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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을 만나다

지혜를 쌓아 가고 싶습니다

by 글꽃향기

2025년 5월 1일, 오랜만에 만난 평일 휴일이었어요. 늦잠을 늘어지게 자며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지만, 뼛속까지 아침형 인간인지라 평소와 다름없이 5시 30분쯤 눈을 떴지요. 정신은 말짱했지만 이불 속에서 잠시 뒹굴며 휴일의 여유를 만끽했어요. 6일간의 연휴가 이어지기에 기대에 부푼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몽실몽실해졌습니다.




내편은 출근을 해야 했기에 나의 게으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30분쯤 뒤부터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미리 씻어서 통에 담아 놓은 상추, 당근, 셀러리를 접시에 가지런히 올려놓았습니다. 사과, 참외, 토마토도 적당히 잘라 놓았지요. 요즘은 삶은 달걀을 하나씩 곁들입니다. 통밀빵 위에 딸기잼을 적당히 발랐습니다. 과일잼을 좋아하진 않지만 언니가 손수 만든 귀한 아이라 함께하고 있습니다. 여유있게 아침 식사를 마쳤습니다.





내편이 출근하고, 집안의 블라인드를 모두 열어 놓았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날씨가 짓궂네요. 이 찬란한 봄날, 엄마와 산책을 꿈꾸고 있었는데 참으로 허무했습니다. 비바람도 모자라 천둥 번개까지 쳐 댑니다. 내가 백화점에 가서 돈을 쓰겠다는 것도 아닌데, 놀이동산에 가서 하루 종일 신나게 놀자 했던 것도 아닌데! 그저 엄마와 정답게 연둣빛 새순과 아름다운 봄꽃을 감상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도 쉽지 않음에 애가 탑니다. 내 맘 같지 않은 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날씨 상태는 조금 더 지켜보자 생각하며 공부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책상 위 먼지,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 그제야 집안이 엉망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먼지를 닦기 위해 다용도실로 자리를 옮겨 봅니다. 주말 청소 후 물에 담가둔 걸레가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잠깐만 담가 놓자!'의 마음이었는데 그로부터 3일이나 지나 버렸네요. 물을 갈아주기 위해 걸레를 집어 드니 이런, 물때가 잔뜩 끼었는지 걸레가 미끌미끌합니다. 물을 버리고 나니 평소와 다르게 비릿한 냄새까지 납니다. 뭔가 유쾌하지 않은 존재가 생겨난 듯합니다.




따뜻한 물에 걸레를 담가 놓았습니다. 몇 번 헹구어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아 지원군을 불러냈습니다. 중성세제를 약간 풀어 거품을 만들어 봅니다. 고무장갑을 끼고 거품 바다에 빠져 있는 걸레를 사부작사부작 주물러 봅니다. 혹시나 하여 타일 바닥에 내려놓고 힘껏 비벼 봅니다.

'청소 후 바로 헹구어 낼 걸!'

그랬다면 따뜻한 물도, 중성세제의 거품도, 고무장갑도 필요 없었을 텐데요. 나의 게으름에 한숨을 내쉬어 봅니다.





공부방에 돌아와서 어질러진 물건을 정리해 봅니다.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미안한 마음도 전해 봅니다. 책상, 책장, 컴퓨터 모니터 곳곳을 살피며 먼지도 닦아내 봅니다. 책상 위가 정리되니 이제는 바닥이 보입니다. 지우개 가루, 머리카락, 과자 가루가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 책상 위 먼지를 닦아 준 걸레는 이제 바닥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방바닥에 무릎을 대고 여기저기에 펼쳐져 있는 불필요한 존재를 한쪽으로 몰아 봅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얼룩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핑계로 곁에 두었던 커피잔과 따스한 물이 담겨 있던 컵이 남긴 흔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다행히 힘을 들이지 않고도 그 흔적들을 지울 수 있었습니다.




방 정리가 끝난 후 거실을 살펴보니 역시나 곳곳에서 얼룩의 흔적이 보입니다. 연휴의 첫날이라 한없이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지만, 그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택배 상자를 뜯다가 생긴 얼룩인가 봅니다. 물건을 잘 품고 있느라 상자를 감싸고 있었던 테이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합니다. 끈적거리기까지 합니다. 걸레로 닦아내 보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몇 번이고 힘주어 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손톱으로 긁어내 봅니다. 거실 바닥에 남겨진 흔적은 조금씩 지워져 갔지만 그 존재는 나의 손으로 옮겨 왔습니다. 끈끈함이 손톱과 손끝에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청소가 끝난 후 손을 씻을 때 또 다른 수고로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주방 쪽에도 얼룩이 보입니다. 개수대에서 음식 재료를 씻고 조리대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떨어진 흔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커피를 내리는 가열대 근처에는 갈색 얼룩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다행히 수고를 크게 들이지 않고 얼룩을 지울 수 있었습니다.





나의 인연과의 얼룩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일터에서 만난 사이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얼룩'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 얼룩은 별 노력 없이 쉽게 지워지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있었습니다.




관계의 소원함을 느껴, 내가 실수를 했나 싶어, 서먹함과 불편함을 느껴, 그 어색함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대화를 시도하고, 잘잘못을 따지다가 오히려 관계가 멀어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얼룩이 없어지기는커녕 더 진해지고 선명해져 버렸지요.




나의 실수를 인정하고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을 때, 그 서먹함이 한순간에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었지만 얼룩을 지울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얼룩을 방치할 때도 있었습니다.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아서, 게으름 때문에, 귀찮은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내버려두었습니다. 때때로 그 얼룩은 저절로 사라져 버리기도 했습니다.

별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흔적을 조금도 남기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참 도무지 알 수 없는 게 사람 사이의 얼룩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진해지는 얼룩

그대로 놔두었기에 오히려 희미해지는 얼룩




같은 상황이라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같은 상대라도 상황이 어떠하냐에 따라 얼룩의 상태는 달라졌습니다. 얼룩을 지우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누군가가 시원스레 가르쳐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때그때 해답을 찾아보고 마음을 전하며 울고 웃기를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집안 곳곳에도, 나와의 인연들과도 얼룩이란 걸 만들지 않을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결국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룩이란 건 내가 살면서 남겨 가는 일종의 흔적이니까요. 그 흔적은 내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니까요.




얼룩을 만날 때마다 생각이란 걸 먼저 해 보겠습니다.




왜 생겨났는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직도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통해서 지혜를 발휘해 보겠습니다. 혹시나 얼룩이 없어지지 않더라도, 그 얼룩이 더 진해진다 하더라도 좌절하지는 않겠습니다. 실망스러운, 아쉬움만 남는 또 하나의 경험을 통해서 다음 얼룩을 대하는 지혜가 조금은 쌓여 있을 거라 생각해 보겠습니다.





조금은 여유로웠던 휴일, 비바람과 천둥 번개가 찾아와 준 덕분에 집안 곳곳의 얼룩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얼룩을 만나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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