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를 건네며 해답을 찾으며

근육을 만들어 본다

by 글꽃향기

<따로 또 같이 쓰는 문장>

마음에도 근육이 필요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래요? 우리반은 그런 일 없는데!"


초짜 시절, 예상치 못한 학생들의 돌발 행동에 과연 그 속내가 무엇인지, 대처 방법은 있는지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아니 그저 '힘들었겠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하지만 확인할 수 있었던 건 '나는 능력 없는 교사'라는 사실이었다. 학생을 매우 사랑하는 분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 그 자체였다. 수업 준비는 꼼꼼했고, 칭찬과 단호함을 학생들의 성향에 잘 맞추어 내셨다. 선배님을 닮고 싶었지만 고개를 숙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랑 있을 땐 안 그런데!"


교과 전담으로 아이들을 만나던 시절, 수업이 참 힘들었던 반 담임교사를 통해 내 귀에 전해진 말이었다. -하지만 소통의 방법에서 나도 큰 실수를 범했었다. 까마득하게 어린 후배가 그 반의 실태를 나열했으니 얼마나 괘씸했을까 싶다. 그 점에선 정말 죄송하다. - 그때 처음으로 쓴맛을 보았다. 초등학생들은 담임교사와 교과 전담 교사를 180도 다르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을. 기껏해야 일주일에 세 시간 만나는 선생님이라 가뿐히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의 만행을 줄이고 줄여서 몇 가지만 나열했을 뿐이었는데 나에게 돌아온 건 '문제는 바로 너!'라는 속뜻을 품고 있었던 차가운 한마디였다.





"아니오. 선생님! 우리 아이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작년까지는 이런 일 없었어요."


이러한 상황에선 도대체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내가 맞이하는 순간은 매번 다르던데. 같은 시각에 같은 속도로 달리는 출근길에서조차 다양한 성격의 운전자들을 앞뒤 좌우로 맞이하는데. 그때마다 속도를 조절하며 적당한 거리를 두며, 때로는 상대는 전혀 알아채지 못할 혼잣말을 건네며, 화풀이도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렇게 하루하루가 다르던데. 성장기의 아이들이 그것도 한 학급에 20명 이상이 모여 있는데 작년엔 이런 일이 없었다니, 작년엔 이러지 않았다니. 정말 모르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특별한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괜히 말 한 번 잘못했다간 나도 배울 만큼 배웠는데 무시하는 거냐는 답변이 오지 않을까 노파심이 들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나에게도 닥칠까 봐 두려웠다. "전에는 없었군요.", "처음이라 아이가 힘들었겠군요." 뭐 그렇게 나에게 건넨 당신의 말을 인지했다 정도의 답변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나 있는 상대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매번 똑같은 시각에 맞이하는 출근길도 다른 태세로 대처하는 나로서는 정답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상황을 판단해 보고, 해답을 위해 머리를 모아보자며 학생의 마음이 움직이길 바랄 뿐이었다. 해답을 빨리 찾을 때도 있었지만, 찾은 해답이 또 다른 고민의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어김없이 또 다른 화를 불러낼 뿐이었다.




도대체 언제쯤 이 모든 일에 노련함을 발휘할 수 있을지, 아니 언제쯤 이 모든 일을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한동안은 나의 무능함과 나약함에 질책을 건넬 뿐이었다. 곱씹으며 탓했고, 지지리도 운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우울감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버거움을 겪어내면서 조금이나마 달라지고 있는 무언가는 분명 있었다.

'공감만 바랐다고? 그거 네 욕심이야!'

'스무 명이 모여 있는 교실 상황을 이해하길 바란다고?'

'그들에게도 학창 시절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너 학교 다닐 때랑 지금이랑 같디?'

그렇게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으니까.




매해 다르다고 생각했던 시간 속에서도 공통점은 있었다. '늘 새로운 일이 펼쳐진다는 것?!'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그 누구도 내가 처한 상황을 나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없음을. 나보다 경력이 많든, 마음이 넓든 결국 나의 상황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고, 그 문제와 고민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임을.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왜 그냥 조용히 지나가는 해가 없는 건지, 의문을 품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에 펼쳐지는 일들을 인정해 버리고, 해답을 빨리 찾아보는 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었다. 공감에 욕심을 내는 것도 옳지 않았다. 그냥 내가 나를 위로해 주면 충분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들로 인해 마음의 근육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내 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아니 적어도 최소한 운명론을 거들먹거리는 시간은 확실히 잘라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대화로 채워 본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조금은 나아진 상황을 만들어 보자 이야기를 건네 본다. 마음에도 근육이 필요하다는 걸, 수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근육은 버거운 일들을 겪어 내어야, 부족함을 인정하여야, 성찰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얻어 낼 수 있다는 것 역시.




나에게 다정하게 말해 본다.

'좀 더 단단해질 거야!'

매일이 새로울, 그래서 나보다 훨씬 더 힘겨워 할 나의 그들에게도 다정하게 던져 본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많을 거야. 지금처럼 해답을 찾으면 돼!"

"나도 날마다 모르는 거 투성이야. 그래도 이렇게 잘 살고 있어!"




그렇게 함께 근육을 만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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