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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끄적끄적

선을 지키십시오!

직진과 유턴 전문입니다

by 글꽃향기


12월 초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길이었다.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리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상태였다. 헤드 라이트를 켠 채 늘 오고 가는 익숙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출발하자마자 어색할 정도로 순탄 대로가 이어진 터라 '나에게 이럴 때도?!?!' 의아해하며 바삐 달려가고 있었다.




왕복 10차선 도로, 주변은 대단지 아파트가 나란히 이어진 곳이라 늘 통행량이 많은 곳이었다. 1차선과 2차선은 좌회전 전용이었고, 나는 3차선에서 일터를 향해 직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를 위한 신호등은 초록빛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고 두 개의 좌회전 차선에는 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100m 앞이었을까? 2차선에서 대기하던 차가 갑자기 우측 깜빡이를 켜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차가 아무리 깜빡이를 켰다 한들, 내가 브레이크를 급하게 그것도 힘닿는 데까지 밟는다 한들 추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빵! 빵!"

'오지 마!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박치기밖에 없다고!'

경고성 경적을 짧고! 굵게! 하지만 의미를 가득 담아 날렸다.




그러나 그 차는 도무지 알아들어 먹질 못했나 보다.무지막지하게 그 커다란 머리통을 계속 들이밀었다.

"빠~~ 앙 빠~~ 앙"

'이 멍청아, 너는 속도가 제로인 상태잖아. 계산이 안 되냐?'

그 녀석이 이미 마지노선을 넘어 버렸기에 브레이크를 급히 밟았다.




이때가 아니면 끼어들 수 없었을 거라 생각했던 걸까? 깜빡이 켰는데 어쩔 건데! 비야냥거리고 있었을까? 기어코 내 앞쪽으로 몸통까지 들이밀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이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어 옆 차선으로 급하게 이동했다. 속도가 나 있는 상태라 내 차는 잠시 휘청거렸다.




나 역시 그 녀석과 다르지 않았다. 핸들을 틀 때 오른쪽 사이드 미러로 옆 차선을 봐야 했다. 하지만 모든 게 순간적이었고 확인할 새가 없었다. 그 시간, 그 자리에 수호천사가 있었던 걸까? 내 차는 별 무리 없이 옆 차선에 안착했다. 혹시나 나의 갑작스러운 이동으로 피해를 본 차량이 없는지 살폈다. 다행히 뒤쪽 한참 저 멀리서 차가 천천히 달려오고 있었다.

"휴우, 살았다!"




오른쪽 깜빡이 그 녀석의 낯짝을 보고 싶었다. 혹시나 도망가 버렸으면 억울해서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지척에서 유유히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오해는 마시라. 규정 속도 이내였다. 그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보기 드물게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초보, 왕초보, 완전 초보"

스티커를 덕지덕지 지저분하게도 붙여 놓았다.

'에효!'




그놈의 낯짝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옆 차선에 바짝 붙어 한참 동안 째려보고 싶은 마음 역시 너울너울 날아가 버렸다.

'애쓴다. 어휴, 너 운 좋은 줄 알아! 각도, 시간 공부 좀 더 하고 다녀!'

맘속으로 외쳐 보았다. 보아하니 그 차도 꽤 놀라긴 했나 보다. 조심조심하는 게 눈에 보였다.




오른쪽 깜빡이 친구를 마주할 일이 없어서, 나 역시 다른 친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운전대를 잡은 지 20년이 되어간다. 그래봤자 집과 일터 사이를 오고 갔던 게 대부분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운전이 서툴고 무섭다. 내가 깜빡이 친구의 상황이었다면, 끼어들기를 시도했으나 도저히 그 기회란 게 나에게 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냥 좌회전을 했을 거다. 나에겐 유턴이 일상이다. 오죽했으면 내 차를 타는 사람에게 시동도 걸기 전에 '저는 직진과 유턴 전문입니다.'라고 선전포고를 할까! 하지만 부끄럽지 않다. 내 능력 안에선 그게 최선이니까. 그래야 나와 여럿의 시간을 그리고 안전을 지킬 수 있으니까.





"각자가 선을 지키면 참 좋을 텐데."

깜빡이 친구를 고이 보내 주고 나서 누구도 듣지 못할 공간에서 나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었다. 과연 나는 깜빡이 친구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지.





학교에서 좌충우돌 사건들이 많았던 시기였다. 11월, 12월은 학생 지도에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시기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10월까지 큰 행사가 대부분 마무리되고, 비교적 안정기에 접어들어 남은 진도에 박차를 가해야 할 시기임이 분명한데 학생들은 아주 많이 흐트러진다. 학년과 반에,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완벽하게 적응한 상태여서일까? 개성은 더욱 도드라지고 그래서 다툼도 민원도 큰 사건도 여기저기서 빵빵 터져 버린다. 심지어 단짝이네, 아이돌 그룹이네 하며 찰싹 붙어 몰려다녔던 절친들 사이에도 금이 간다. 그조차 성장의 한 과정이려니 생각하지만, 때로는 말도 안 되게 이기적인 행동들이 나온다.




"너희는 타인과 잘 지내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곳에 모인 거야."

"제일 중요해! 잘 어우러져 지내는 것!"

"선을 지키십시오!"




마르고 닳도록 강조하지만 쉽진 않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그래도 아직 아이들이니까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나마 낫다.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니까. 세상 모든 일이 다 처음일 텐데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할까. 동료들도 대부분 그렇게 말한다.

'애들이 그러는 건 괜찮아요!'

맞다. 애들이다. 배우면 된다.




나는 선을 지키고 있을까? 내가 지켜내지 못하는 선은 무엇일까?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내가 순간순간 머무는 모든 공간에서. 운이 좋아서 이렇다 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 나 역시 깜빡이 친구와 같은 행동이 분명 있을 텐데 말이다.




성별, 나이, 직업, 지위 불문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선을 지켜 간다면 모두가 더 안전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지켜야 할 선은?


규칙과 질서 지키기

학생들 차별하지 않기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정신 건강 유지하며 긍정적인 마음 간직하기

미루지 않고 시간 안에 그리고 야무지게 해내기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기

그릇된 행동하지 않기

배움의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기





나열하려면 끝도 없겠다. 그리고 순간순간 지켜야 할 선은 늘어나겠지. 뭔가 멋들어지게 사회에 공헌은 못하더라도 내가 속한 세계에서 선을 지켜가며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그리고 상처 주지 않으며 살아가고 싶다.




'오른쪽 깜빡이 친구야, 너를 통해 또 한 가지를 배웠다. 고맙다. 하지만 우리 두 번 다시 만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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