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표현하다
[따로 또 같이 쓰는 첫 문장] 돌아보면 참 무지했다.
출처 : <다시,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84쪽
돌아보면 참 무지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그만인 줄 알았다. 알겠다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답하면 끝나는 줄 알았다. 사과했고, 바라는 것을 말했고, 다음부터는 조심하겠다고 고개까지 끄덕여 줬으니 찜찜한 감정은 모두 사라졌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그 후로도 두 친구는 서로 으르렁댔다. 수업 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나, 교실이든 복도든 운동장이든 뭔가 꼬투리를 잡아내려고 했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인정사정없이 소리를 쳐댔다.
"선생님, 쟤 딴짓해요!"
"선생님, 쟤 복도에서 뛰었어요!"
"선생님, 쟤 숙제 학교에서 했어요."
"너는? 너는 이랬잖아!!!!"
다른 아이들에겐 관심도 없으면서 자기 자신도 완벽하지 않으면서 서로에게만 계속 시비를 걸었다. 오히려 몸으로 치고받고 싸우는 것보다도 해결하기가 더 힘들었다. 마음 같아선 '서로 쳐다보지도 말고, 신경 쓰지도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마!'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입에선 절대 나와서는 안 될 말이다.
두 친구의 몸은 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는 듯했다. 그 끈은 너무나 복잡하게 꼬이고 꼬여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맞다, 어린 시절 나 역시 그랬다. 언니들과 싸웠을 때, 엄마는 호되게 야단을 치셨고 우리는 그런 엄마가 너무 무서웠다. 우리는 무언의 휴전 협정을 선언했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엄마 앞에서 사과를 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싸움을 이어나갔다.
"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언니도 지난번에 나한테 이랬잖아!"
늘 그런 식이었다. 네가 그래서 내가 이랬고, 내가 이러면 훗날 네가 또 되갚아 주었다. 그리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이 복잡한 굴레는 무한 반복됐다.
그 전쟁이 언제쯤 끝났는지 모르겠다. 기분이 좋으면 깔깔대며 정답게 놀다가도 누구 하나라도 수틀리면 언제 어디서든 긴장 상태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땐 그냥 그러고 놀았다. 그렇게 싸우다 걸리면 또 혼났고, 잠시 휴전 협정을 맺었고, 다시 서로에게 날카로운 촉을 들이댔다. 어른들은 그러면서 크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내가 어렸을 때 당연했던 싸움과 갈등은 '학교폭력'이란 이름으로 모습을 바꾸어 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사람을 당황스럽게 한다. '학교폭력'이란 수식어가 붙으면 두 친구는 '사안 관련자'란 이름으로 불린다. '가해자', '피해자'란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실타래를 풀다 보면 짐작과는 달리 '가해자', '피해자'가 뒤바뀌는 경우도 다반사다. 대부분은 서로에게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
내가 어렸을 땐 그러면서 크는 거랬다. 하지만 그 말속엔 진리가 있었다.
그러면서 나의 감정도 표현하고, 그러면서 타인과 소통했다.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흘기면서, 싸우면서, 혼나면서 감정 조절이란 걸 배웠다. 성인이 되어서까지 감정 조절 문제가 이어지지 않도록 혹은 최소화하도록, 학교란 공간에서 이걸 배워야만 하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게 됐다. 신체적인 폭력이 동반되는 게 아니라면 아이들의 자잘한 싸움은 어른인 우리가 기다려 주고 포용해 줘야 한다. 그리고 정 안 맞는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아이들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고, '나만 억울해!'라는 인식이 뿌리박혀 있다. 한순간도 기분이 나빠지면 안 된다. 부모님의 생각도 다르지 않은 경우가 아주 많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 역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좀 싸워도 보고, 울어도 보면서 자신의 감정을 읽어 봐야 하는데, 상대와의 관계의 깊이에 따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배워야 하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그 선이란 걸 지켜내는 것이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있는데, 그래서 지켜내지 못할 때도 많은데 어린아이들은 오죽할까?
이제는 방법을 달리한다.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 억울함을 호소하면 일단 이야기를 모두 들어준다. 그리고 억울함의 상대를 다정하게 부른다. 이때 이름이 불린 아이는 경계 태세부터 갖춘다. '이미 선생님은 내 편이 아니잖아요! 쟤 말만 들었죠?"라는 불신의 표정이 가득하다. 말투는 예의를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됐다. "난 누구의 편도 아니야. 나는 이런 상황을 해결하려고 이 자리에 있는 거야!"라고 말하며 분위기를 최대한 바꿔 줘야 한다. 조금씩 불신의 눈빛이 가라앉도록.
양쪽의 말을 듣다 보면 이 갈등의 뿌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졌음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양쪽의 친구들 각자에게 벌어진 상황을 차근차근 말로 되풀이해 들려준다. 한 걸음 물러나서 듣는 자신들에게 벌어진 이야기에 50퍼센트 정도의 친구들은 감정이 진정되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거치고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는 대부분 저학년의 경우인데, 그 친구들에겐 하나하나 알려 줘야 한다. -
준비가 되면 갈등의 늪에 빠진 친구들을 마주하게 한다. 내 앞에서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시간을 준다. 으르렁댈 때는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더니 또 화해의 기운이 돌 때는 수줍은 듯 말 한마디 못 꺼내는 친구들이 있다. 그럼 나의 말을 따라 하게 한다.
“네가 자꾸 째려봐서 기분이 나빠서 그랬어. 너 4학년 때도 그랬잖아 이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도 미안해”
시작은 보통 이렇다. 빨리 나를 찾아오는 친구들은 이렇게 한두 마디를 주고받으며 상황이 종료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골이 더 깊어져 있다. 처음 시작은 '째려보기'지만 '괴롭힘'이나 '따돌림'으로 이어져 있는 경우도 다반사다.
나 역시 어른이 되고 나서야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게 된 것 같다. 그 시작은 내편이었다.
"친구 남편은 친구들에게 이렇게 해 주는데, 오빠는 나에게 그렇게 해 주지 않으니 너무 서운해. 친구들 앞에서 너무 자존심 상해!"
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 얼마나 내편에게 으르렁댔는지 모른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툭 터놓고 마음을 드러냈더니 내편이 달라져 있었다. 내편에게 참 고맙다. 만약 내 마음을 무시하고 나처럼 으르렁댔다면 감정의 골은 더 깊어졌겠지. 꼬마 친구들을 대하는 방법도 달라졌겠지. 아직까지는 이 방법이 잘 통하고 있다. 정말 심각하게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꼬마 친구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터놓고 말해준다.
"선생님, 자존심 다 버리고 남편에게 맘을 털어놨어. 그랬더니 남편이 선생님 마음을 이해하더라."
"너희들이 말 안 하면 아무도 너희들 마음 몰라. 네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 마음 이 보이니?"
자존심까지 다 내려놨던 나의 이야기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절반 정도의 친구들은 알아들을 거라 굳게 믿는다. 훗날에도 나의 이야기를 기억해 주길! 그래서 누군가와 갈등이 있을 때 -결과가 어떻게 되든 - 최소한 마음을 표현할 기회는 잃지 않기를 바라고 바란다.
학교란 작은 사회에서 팽배한 이 예민한 분위기가 훗날 어떤 사회로 이어질지 너무나 두렵다. 우리 어른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서 작은 다툼과 갈등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봤으면 한다. 물론 유쾌한 기억만 남아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배운 것이 분명 더 많다.
어느 상황이든 겉으로 주고받는 형식적인 사과로 상황을 종료해 버리는 무지함에선 벗어났다. 내가 언제까지 이곳에서 머무를지 알 수 없지만, 그 순간까지 친절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법을 알려주고 싶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그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을 거란 전제하에! 나의 에너지가 남아 있는 한! 아주 사소한 상황일 때를 놓치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