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 위에는 스킨, 세럼, 크림, 그리고 쓰지 못한 색조 화장품이 가득하다. 나는 힘에 겹게 수많은 색들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가 소개된 글들을 본다. 그중 깊게 빠지게 되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를 보고 있자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지나칠 수가 없다. 나는 20살 이후 수백 편이 넘는 영화를 계속 보고 있다. 그런데 모든 장면을 곧바로 회상할 수 있는 영화는 단 하나도 없다. 그중에 몇 작품만 오래오래 감상하였더라면 그것들은 내 뇌리 속에 귀한 재산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책이 정말 많다. 트렌드를 익히는 동시에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고 싶은 난, 눈에 담을 사진과 글들만 해도 억압을 느낄 지경이다. 그저 스치는 정도라 하더라도 곧 숨이 막힐 듯이 답답하다. 실제로 한 달 전에는 과호흡이 오기도 했다. 수많은 명저, 거기에 다달이 쏟아져 나오는 화제성 잡지, 그리고 에세이가 홍수같이 밀려온다.
나와 다른 분야를 그저 많이 알고 있음을 뽐내는 사람도 있다. 최소한의 교양을 위한 입문서도 있다. 하지만 그 입문서가 너무나 많다. 나의 길과 또 다른 수많은 길의 최소공배수를 구하기도 전에, 이대로는 죽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서점에서 쏟아져 나오는 베스트셀러를 읽지 않았을 때에는 큰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다. 소비에 대한 욕심을 줄이고 뒤쳐짐을 판단하지 않는 시대가 오기는 할까.
오늘 열린 전시회를 재빨리 가려고 달려드는 생각과 함께,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나의 하루 동안 마음을 천천히 풀어줄 갈비탕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하나하나 거두기에는 우리의 수가 많고 나의 시간은 촉박하다. 오늘은 힘든 내 육신이 뜨뜻한 국물을 마시고 싶어 했다. 마음은 편하지만 이내 잠이 들기 전, 느긋한 하루를 보낸 내가 빚에 쪼들리는 사람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