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 여신
“지난주에 소개팅 잘했어?”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 앞에서 친구가 물었다.
“글쎄, 내 스타일은 아니었어.”
“아, 잘 안됐구나.”
친구는 약속이 있는지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들고 급히 사라졌다.
여기저기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며 내는 소리에 학교가 소란스러웠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학교 밖 어디론가 향했고 학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금세 조용해졌다. 나는 봄 햇살이 전해주는 기분 좋은 온기를 느끼며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앞에서 남녀가 팔짱을 끼고 서로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활짝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다리를 꼬고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남녀도 보였다. 남자는 대화 도중에 여자의 머리카락에 붙어있는 꽃씨를 다정하게 떼어주기도 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여자는 화가 나 있었고 남자는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애처로울 정도로 빌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참 맑았다.
“하아.”
하늘을 향해 숨을 크게 내쉬고는 고개를 떨궜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툭툭 엉덩이의 먼지를 털어내고는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서 현관 입구에 있는 전신 거울에 나를 가만히 비추어 봤다. 살이 쪄서 뚱뚱했다. 문득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녁 식사를 거르고 지하 일층에 있는 아파트 헬스장으로 갔다. 기구는 오래되어 낡은 느낌이었지만 사람이 많지 않아 운동하기는 오히려 좋았다. 덤벨이 일렬로 쭉 진열되어 있는 거치대로 갔다. 일단 만만해 보이는 크기의 덤벨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생각보다 육중한 무게감에 그만 몸이 중심을 잃고 거치대 쪽으로 딸려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위를 자연스럽게 둘러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얀색 헤어밴드를 머리에 두른 말라깽이 한 명이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양팔을 앞으로 쭉 내민 채 다리를 부들거리며 앉고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행히 제 운동에 집중하느라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급히 자리를 옮겨 운동 기구 하나를 잡았다. 랫풀다운이라고 써져 있었다. 머리 위에 매달린 기다란 봉을 양손으로 잡아서 위에서 아래로 당기면 됐다. 망신을 당하지 않도록 제일 가벼운 무게로 시작했다. 어느 정도 하다가 다른 기구로 옮겼다. 레그익스텐션. 무릎을 접었다 폈다 하는 운동인데 기구 옆에 붙어 있는 그림을 보니 허벅지를 강화하는 운동 같았다. 아까 그 말라깽이가 무슨 운동을 하는지 궁금했다. 나는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말라깽이를 슬쩍 살펴봤다. 말라깽이는 깃털같이 가벼워 보이는 핑크색 덤벨을 양손에 들고 마치 만세 하듯 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었다. 나는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내가 거치대에서 들었던 덤벨은 말라깽이가 들고 있는 핑크색 덤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무거웠다. 나는 기구에 앉아 미친 듯이 오금을 접었다 폈다 하며 남자다움을 한껏 과시했다. 말라깽이도 계속 만세를 하며 나를 힐끔힐끔 보는 듯했다. 나는 몇 가지 운동을 더하고 나서야 집으로 올라왔다. 말라깽이는 내가 집에 갈 때까지도 여전히 부들거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들고 있었다.
*****
학교 수업은 오전이면 다 끝난다. 용돈도 벌고 시간도 알차게 쓸 겸 오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온라인 구직 사이트에 가입했다. 마침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는 모집 공고가 있었는데 운좋게도 집 앞 편의점이었다. 다음 날 면접을 봤고 오후 9시까지 일하기로 했다.
편의점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손님 응대와 물건 값을 계산하는 것 이외에도 상품 정리, 폐기식품 확인, 재고 채우기 등 여러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모두 단순한 일들이라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홉 시가 되자 교대 근무자가 왔다.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가느다란 손목에 새겨진 푸른 십자가 문신은 그녀의 하얀 피부와 묘하게 잘 어울렸다.
나는 그녀와 일을 교대하고 아파트 헬스장으로 갔다. 가볍게 팔다리를 놀리며 무슨 운동을 할지 생각 중이었다. 그 순간 긴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묶고 샛노란 레깅스에 하얀색 브라 톱을 입은 여자가 헬스장으로 들어왔다. 몸을 꽉 죄는 레깅스와 브라 톱은 하늘을 향해 한없이 치켜 올라간 동그란 엉덩이의 굴곡과 진갈색의 탄탄한 아랫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여신의 등장이었다. 심장이 가빠졌다. 여신의 모든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너무 힐끔거렸는지 눈 주변 근육이 피곤해질 때쯤 여신이 헬스장을 나갔다.
나는 헬스장의 모든 기구에 번호를 매겼다. 등 운동 기구인 랫풀다운은 삼 번, 가슴 운동 기구는 칠 번. 이런 식이다. 그리고 여신이 삼 번 기구에서 운동을 하면 난 십오 번 기구로 가서 앉는다. 그러면 헬스장 벽면 곳곳에 붙어 있는 전신 거울을 통해 삼 번 기구에서 운동하는 여신의 모습이 바로 내 앞에 있는 거울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런 방식으로 모든 기구를 서로 짝지어 줬다. 더 이상 눈치를 보며 곁눈질하지 않아도 될 테다. 다음 날. 오후 열 시쯤 되었을까. 하얀색 헤어밴드에 헐렁한 민소매 티를 입은 그 녀석이 피곤한 얼굴로 헬스장에 나타났다. 나와 눈이 마주친 말라깽이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고 이내 헬스장 여신을 발견했다. 말라깽이는 여신의 모습에 꽤 충격을 받았는지 양손을 허공에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허둥대고 있었다. 말라깽이의 눈 주변 근육이 경직되어 휴식이 필요하겠다 싶을 즈음 말라깽이는 급히 어디론가 뛰어나갔다. 얼마 뒤 돌아온 말라깽이로부터 달콤하고 시원한 향이 났다. 향수를 뿌리고 온 듯했다.
‘졌구나.’
왠지 모를 열패감이 느껴지게 만드는 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