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 말라깽이
“멸치 같은 놈이.”
“네?” 앞에 있는 손님이 물었다.
말라깽이를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보다.
“아, 아니에요. 다른 생각을 하다 그만. 죄송합니다.”
나는 얼른 물건 값을 계산했다. 이제 곧 있으면 야간 근무자인 그녀가 올 것이다. 오후 여덟 시면 냉장식품과 유제품 등이 입고되는데 물품 검수와 정리를 다하면 거의 퇴근 시간이었다. 아홉 시가 다 됐는데도 아직까지 물류 트럭이 도착하지 않았다. 게다가 간단한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항상 아홉 시 전에 왔던 그녀 역시 교대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헬스장 늦겠는데.’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아홉 시 십오 분이 다 되어서야 그녀가 헐레벌떡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급히 계산대 안으로 들어와 내 옆에 섰다.
“차가 막혔나 보네요?”
쏘아붙이려 했지만 밭은 숨을 내쉬며 어깨를 들썩거리는 그녀를 보니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몸이 좀 안 좋아서 잠깐 쉰다는 것이. 정말 죄송해요.”
몸이 안 좋다는 말에 원체 하얗던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그때 물류 트럭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사고가 났는지 차가 꽉 막혔어요.” 물류 트럭 운전기사가 말했다.
이제부터는 물품 검수며 정리를 그녀가 해야 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홉 시 이십 분이었다.
‘어떡하지? 몸이 안 좋다는데.’
그녀를 힐끔 봤다.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모른 척 하기에는 그녀가 너무 힘들어 보였다. 나는 그녀 대신 입고된 물품을 물품 리스트와 대조하며 맞춰보기 시작했다.
“제가 할께요.” 그녀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잠시 앉아 쉬라고 권하고서 물품 검수를 끝마쳤다. 그리고 매대에 새로 들어온 상품을 채워 넣고 유통기한이 지난 상품을 폐기 등록했다. 이제 가도 될 것 같았다.
“저 이제 가 볼게요. 수고하세요.”
"너무 고마워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
다음 날 교대 시간이 되자 점주가 나타났다. 야간 근무자가 몸이 안 좋아서 며칠 동안 자신이 대신 나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전날 창백했던 그녀의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집에 돌아와 헬스장 갈 준비를 했다. 옷장에서 반팔과 반바지를 꺼내 입고 마지막에 누나의 향수를 공중에 아낌없이 분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아파트 헬스장으로 내려갔다. 여신이 팔 번 기구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사 번 기구로 가야지만 정면에 있는 거울을 통해 그녀를 볼 수 있다. 사 번 기구를 찾아 고개를 돌렸는데, 생선 가시 같은 갈비뼈가 훤히 보이는 헐렁한 민소매 티를 입은 말라깽이가 그 가느다란 팔로 딱 봐도 무거워 보이는 중량을 부들거리며 들어올리고 있었다.
‘우연이겠지.’
난 덤벨 앞에 서서 기회를 보고 있었다. 여신이 십이 번 기구로 옮겼다. 칠 번으로 가야 한다.
"쾅" 말라깽이가 들고 있던 중량을 내팽개치듯 내려놓더니만 칠 번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저 새끼가.’
우연이 아니었다.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여신이 다른 기구로 이동할 듯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드디어 여신이 움직였다. 십삼 번. 이 번으로 뛰어갔다. 간발의 차이였다. 손을 쭉 뻗어 봉을 잡지 않았으면 뺏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 앞에서 이만 사라지라는 의미로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도 눈치챘는지 멋쩍게 웃으며 자리를 비켜 줬다. 그 뒤로 여신이 기구를 바꿀 때마다 나와 말라깽이는 헬스장 기구 사이를 잰걸음으로 바삐 움직였다.
며칠 뒤 헬스장에서 본 말라깽이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헤어밴드, 헐렁한 민소매 티,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반바지, 양말, 운동화까지 온통 백색이었다.
‘백설기같은 새끼!’ 나는 속으로 비웃으며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봤다.
카키색 반바지, 파란색 운동화, 덤벨 모양이 앞면에 크게 프린팅 된 하늘색 반팔 티셔츠가 모두 조화롭게 잘 어울렸다. 때마침 여신이 들어왔다. 여신은 백설기의 꾸밈새를 보고 눈을 떼지 못하는 듯했다. 그 순간 백설기와 여신의 눈이 마주쳤고 여신은 백설기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까딱하고 지나갔다. 여신의 미소를 받은 백설기가 고개를 휙 돌려 나를 쳐다봤다. 울컥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새로 산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상의는 몸에 딱 달라붙는 기능성 운동복을 착용했다. 불룩한 배가 너무 도드라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숨을 참고 있으면 나름 볼만했다. 야구 모자도 푹 눌러썼다. 모두 검은색이었다. 운동화까지 검은색으로 완벽하게 맞춰 신고 나가려 했다.
“야, 그 몰골로 어디 가. 사람 많은데 가면 안돼.” 소파에 앉아 나를 지켜보던 누나가 급히 말을 꺼냈다.
나는 현관문을 신경질적으로 쾅 닫고 나왔다. 헬스장에 도착했다. 말라깽이가 나를 쳐다봤다. 무례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봤다. 곧이어 여신이 들어왔고 나와 눈이 마주친 여신은 나에게 눈인사를 했다. 나는 말라깽이를 향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말라깽이의 얼굴은 자신이 본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