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란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관심 분야가 많아지는 사람일수록 행복해질 기회는 그만큼 많아지고 불행의 여신의 손에 휘둘릴 기회가 적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흥미를 찾아다니는 '입문왕'으로 살다 보니 요즘 내 삶은 불행보다는 행복에 가까운 것 같다. 새로운 관심사가 생기려면 먼저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고 몰입을 위해 건강한 신체가 필요하다.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약간의 경제력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심리적으로, 신체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쫓겨 지내다 보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한 상태에서 진정 무엇인가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충분하다고 느끼는 그 감정 상태가 바로 행복 아닐까?
아마 올해 나의 충분함을 열어준 시작은 브런치에 글을 쓴 일일 것 같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다. 그동안 너저분하게 늘어져있던 생각의 편린들을 한 곳에 모아 차곡차곡 쌓아두는 행위를 통해서 과거에 좋아했던 것을 되새김질하는 습관을 버리고 비로소 새로운 무언가를 맞이할 정신적 여유를 갖게 된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이번엔 F1이다.
발단은 넷플릭스에서 F1 다큐를 본 일이겠으나 그것도 몇 달 전의 일이었는데 그저께부터 급격하게 F1의 생태계를 공부하는 내 모습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래서 트리거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 사흘 전만 해도 나는 유로2020 하이라이트를 보다가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의 도미니크 소보슬라이라는 선수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그리고 헝가리의 역사와 지리, 언어, 문화 등에 대해 유튜브와 나무위키를 섭렵하면서 미래의 슈퍼스타가 될 거라는 나만의 촉을 음미하며 소보슬라이의 잘츠부르크 시절 유니폼을 주문하는 게 좋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났더니 출근길에 F1에 대해 검색하고 있는 게 아닌가? 어떤 팀의 팬이 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말이다. 무의식 중에 이상한 꿈을 꿨나?
노는 것이 곧 삶이었던 7~9세 무렵 즐겨보던 TV 프로그램 중에 <달려라 부메랑>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부메랑-불타는태양-슈팅스타-캐논볼-춤추는인형의 다섯 자동차가 등장하는데 각각 독특한 아이덴티티가 있었다. <텔레토비>를 보면서도 누군가는 뚜비가 좋다고 또 어느 누구는 뽀가 자기 취향이라고 하듯이 아마 인간은 나와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을 구분해야 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는 것 같다. 텔레토비의 나나를 좋아하는 나는 만화에 나오는 다섯 자동차 중에 어떤 게 가장 내 취향 일지 진지하게 고민하여 4개의 나란한 배기구가 멋진 카멜레온의 미니카, 4번 캐논볼을 낙점했었다. 이후에 <우리는 챔피언>이라는 만화를 보고 친구들과 매그넘이니 소닉이니 하는 미니카의 부품을 사러 문방구를 뒤지고 모터를 업그레이드하느라 많은 용돈을 쓰기도 했고, 일본 사이버 포뮬러의 번역작인 <영광의 레이서>를 보고는 손가락으로 아스라다의 모양을 만들며 놀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캐논볼의 의지를 이어받았던 것일까? 약간은 뜬금없는 시작이었지만 불과 며칠 만에 푹 빠져들었다. F1 관련 커뮤니티와 나무위키, 유튜브를 통해 속성으로 공부하며 우선 팀을 정하기로 했다. F1에 참가한 10개의 팀 가운데 맥라렌과 페라리, 그리고 윌리엄스까지 3팀은 나름 근본 있는 명문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다만 세 팀 모두 현시대에 절대적인 포스를 뽐내는 팀이 아니었고, 특히 윌리엄스는 워낙 저조한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고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없어 팬이 많지 않은 팀이었다. 강팀으로 치자면 메르세데스가 Sir 루이스 해밀턴과 함께 최근 몇 년 간 F1의 생태계를 지배해왔고 올해부터는 레드불이 막스 베르스타펜을 앞세워 월드 챔피언을 가져올 것으로 보이지만, 두 팀 모두 어딘지 모르게 끌리는 스토리는 아니었다. 드라이버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핀란드의 키미 래이쾨넨이 있는 알파로메오는 어떨까? 세계에 단 20명밖에 없는 F1 드라이버 생활을 취미로 한다고 하는 멋지고 시크한 형님이지만 알파로메오(前 자우버)라는 팀 자체는 큰 이야기 요소가 없어서 아쉬웠다.
내 맘에 쏙 들어온 팀은 영국의 맥라렌. 굳이 따지자면 2010년대의 리버풀과 비슷한 느낌이다. 현재 절대자는 아니지만 중상위권에서 꾸준히 포인트를 쌓고 있고 과거 명문이었으며 레전드가 즐비한 팀. 언젠가 비상하며 다시 정상에 올라설 포텐이 있는 팀. 트로피를 드라이버에게 주지 않고 팀에 전시할 정도로 개인보다는 팀이 우선이고, 공들여 유스를 키우며 퍼스트-세컨드 드라이버의 개념이 비교적 약한 팀. 특히 아이덴티티 컬러인 오렌지와 올해부터 사용한 로열블루 색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미학적으로도 눈을 확 끄는 매력이 있었다. 현재 드라이버인 다니엘 리카도와 란도 노리스 모두 긍정적이고 유쾌한 스마일 가이들이라 인성도 합격.
한국에서 모터스포츠의 인기가 높지 않아 생중계를 접하긴 다소 어렵지만 그래도 JTBC Golf&Sports에서 녹화 중계를 해주고 있어 인프라가 열악한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입문을 할 때마다 아내에게 썰을 풀다 보니 어제는 아예 이번 주 열렸던 프랑스 그랑프리 녹화중계를 같이 보게 되었는데, 1시간 40분간 영상을 보고 나니 아내도 새로운 재미를 느낀 것 같다. 재밌는 것은 디자이너인 아내의 눈에도 가장 매력적인 팀은 맥라렌이었다는 사실. 부부의 취향이 비슷해서 좋다. 앞으로 유럽여행을 가게 된다면 테니스 성지순례에 이어 서킷을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F1, 새로운 관심사로 앞으로 많은 즐거움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