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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춤 Jun 22. 2021

입문, 위스키

행복의 정복 #2


우리나라에서 소주라는 술은 정파의 본류다. 무림으로 치면 소림사. 외국에 가서 술을 먹으면 꼭 Do you know Soju?라고 물어본다. 소주 경험이 있는 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인상을 갖고 있다. 소주는 여러 한국식 안주와 어울린다. 탕, 국, 찌개, 특히 매운맛이 나는 국물요리와 곁들이는 경우가 많다. 술을 본격적으로 먹는 자리라고 하면 대부분 소주가 메인이다.


소주는 의무감을 가졌을 때만 마셨다. 학생회 활동을 할 때나 회식 자리에서 기수 노릇을 해야 할 때, 원래 잘 마시는 양 때려 마셨다. 그러나 숙취가 너무 심한 편이라 다음날 저녁까지 구토와 몸살을 앓았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극도의 집중력을 유지하려 애써보지만 결국 중간에 내려 식은땀을 뺀 적도 많았다. 사무실에서 고생하는 것을 하도 봐서인지 회사 동료들도 나에게 소주를 권하지 않는다. 소주 딱 한 잔만 받겠다고 해도 선배들이 말릴 정도다. 소주병이 굴러 다니는 술자리를 가진 다음 날은 정신적으로도 힘들다.


맥주는 사파 취급을 받는다. 술이 아닌 음료. 칼의 세계에서 검술이 아닌 봉술, 창술 같은 느낌이다. 소주 한 잔이라는 노래는 있어도 맥주 한 캔이라는 노래는 없다. 회식 자리에서 맥주를 시키면 왠지 오늘 좀 뺀다는 인상을 준다. 대체로 튀김류의 헤비한 안주에 곁들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맥주는 배불러서..'라는 말의 주인공이다. 많은 사람들이 맥주는 시원한 맛으로 먹는다고 하니 곁들임 음료의 지위를 갖는 것도 나름 일리는 있다.


소수의 사람들과 맥주 한 모금에 대화 한 움큼 주고받는 자리는 중독성이 있었다. 해외여행이나 출장을 가면 꼭 그 나라의 맥주를 마셔보고 병이나 캔 뚜껑을 수집했다. 교환학생으로 뮌헨에 잠깐 살 때는 1일1맥이 습관일 정도였다. 맥주의 나라에 유학(?)을 다녀왔을 정도이니 그런대로 조예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 최고의 맥주? Bayern의 Augustiner Helles. 제일 맛있는 맥주는? Bamberg의 Schlenkeler Weisen와 Augustiner Radler. 모두 Draft로 마셔야 한다. 하지만 독일을 떠나온 이후로 이거다 싶은 맛있는 맥주를 마셔본 기억이 없었던 것 같다. 4캔에 만원 하는 맥주를 사본 지가 꽤 오래된 것 같다.


(막걸리는 무림 어디에나 있는 개방과 같은 느낌이다. 허술해 보여도 실력은 있다. 그들을 존중하지만 그다지 멋스럽진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요즘은 젊은 개방 제자들이 부흥을 위해 국내 각지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지난주 위스키에 입문했다. 최근 반년 동안 스스로 술을 마셔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뜬금없이 위스키에 꽂혔다. 일단 많이 마시지 않아 다음 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소주가 주는 괴로움이 없을 것 같았다. 껍데기만 번지르르하고 맛은 거의 똑같은 수입맥주 한 캔은 늘 먹다 남겨 버리기 일쑤였는데 위스키는 딱 한 잔이니 좋을 것 같았다. 술이 당길 때 딱 한 잔. 비싼 술이니 최대한 음미하며 먹을 수 있었고 딱 한 잔만 먹는다면 사실 비싼 것도 아니니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위스키를 마셔본 적이 있지만 귀하고 독해서 다신 먹지 않으리라 생각한 적이 있다. 아저씨들이 유리장에 숨겨놓고 있다가 손님이 오면 꺼내는 술이라 귀했지만 도수가 30도를 가뿐히 넘어 누군가에는 치사량이나 다름없으니 독했다. 그나마 얼음을 넣어 마셨는데도 입에 넣자마자 이게 무슨 맛이야, 생각했었다. 그렇게 평생 연이 없을 것 같은 놈을 내가 찾게 될 줄이야.


마침 회사 동료들과의 저녁 약속 자리가 있어 생각난 김에 위스키를 마셔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는데, 마침 후배가 반색을 하며 본인이 조예가 제법 있다고 즉석에서 Bar에 예약을 걸었다. 한 껏 기대하며 들뜬 마음으로 입문식을 거행했다.


보통 위스키 입문은 버번위스키로 한다고 한다. 가격도 적당하면서 엔트리로 퀄리티도 나쁘지 않은 3대장이라고 해서 와일드 터키, 메이커스 마크, 버팔로 트레이스를 꼽는다. 원래 나도 버번으로 입문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날 후배가 주문한 술들 가운데 버번은 없었다. 버번은 어떠냐고 물어보니 우선 이것을 드셔 보시라고.


발베니 The Balvenie 12Y Double wood

카발란 Kavalan Solist Sherry

브룩라디 옥토모어 Bruichladdich Octomore 10Y (Vintage 2008, 56.8%)

잭다니엘 Jack Daniel's

글렌모렌지 시그넷 Glenmorangie Signet

라가불린 Lagavulin 16Y

야마자키 Yamazaki 12Y


독한 술이니 맛이 다 비슷할 거라 생각했는데 마셔보니 생각보다 각각의 특성이 두드러져서 한 잔씩 시음을 할 때마다 새로운 재미가 있었다. 발베니는 무난했고 카발란과 시그넷은 화사했으며 잭다니엘은 경쾌하고 부드러웠다.


뜻밖에도 내 취향은 가장 독한 피트 위스키인 브룩라디 옥토모어 10Y였다. 피트 위스키라고 하면 소독약 냄새가 강하게 난다고 하는데 피트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옥토모어는 소독약보다 더 강렬한 훈연향이 독보적인 개성을 뽐냈다. 특히 스타트부터 피니쉬까지 향이 계속 맴돌아서 그런지 옥토모어를 마시면서부터는 향이 약한 다른 술들이 다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두 번째로 마음에 들었던 술은 라가불린 16Y. 이 친구는 옥토모어에 비해서는 약했지만 다른 술에 비해선 괜찮았다. 재밌는 점은 스모키함이 끝에서만 아주 잠깐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 아주 미묘한 부분이 이 술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하니 위스키의 세계란 생각보다 더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도전할 위스키는 어떤 녀석이 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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