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곤 Jun 02. 2023

12. 생애 최초 명품구입기 In 밀라노, 그리고 반성

교환학생과 이탈리아, 몬테 나폴레오네 거리와 세라발레 아웃렛

1. 가을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기가 시작되니 과제도 많고 정신이 없다.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닌 나는 뭔가를 할 때도, 쉽게 빨리 처리하는 남들보다 훨씬 긴 시간 책상에 앉아 밤까지 전전긍긍할 때가 많다. 밤의 내 방. 여기 이곳이 지금 내게는 전부인 공간이자 시간이다. 그때 휴대폰이 울려 보니 할머니였다. 한국시간으로는 지금이 아침인데, 할머니께서는 전화기 너머 “잘 지내지? 용돈 좀 보냈으니까 나들이옷도 좀 사 입어~”하곤 뚝 끊으셨다. 아마 옛날에 로밍이 안 되던 시절을 생각하시고, 국제전화가 비싸다고 판단해 바로 끊으신 것 같았다.

   

2. ‘나들이옷’이라는 단어도 오랜만에 듣는다. 요즘 우리 세대는 이런 말을 잘 안 써서 생소할 수 있다. 나도 어릴 때는 ‘나드룟’이라는 외국말인 줄 알았는데, 이는 고유어로 말 그대로 나들이하고 소풍 갈 때 입는 옷이다. 실상에서는 특히 새 옷, 아끼는 비싼 옷들을 비롯해 잘 차려입은 옷을 나들이옷이라고 부른다. 할머니는 폼생폼사 패셔니스타인 반면, 우리 부모님은 보여지는 걸로 꾸미는 것보다도 내면을 채우라며 속물을 경계하라 강조하신다. 하지만, 명품 패션의 성지인 밀라노에 왔으니, 그리고 기회가 주어졌으니, 나들이옷을 한번 사봐야지.


3. 아침이 밝자마자 패션과 디자인의 상징으로 불리는 ‘몬테 나폴레오네 거리(Via Monte Napoleone)’를 찾았다. 거리 골목의 매장마다 대를 이어온 장인들이 직접 만든 옷들이 놓여있다. 옷들도 워낙 예쁘고 멋있었지만, 거리를 걷는데 쇼윈도에 보이는 설치미술에 더 눈이 갔다. 매장마다 경쟁하듯 그 화려함을 자랑하는데, 가히 세계의 유행을 시작하는 거리라는 말이 어울렸다. 나중에 구찌 매장에서 일하는 학교 친구, 줄리아에게 물어보니, 이 쇼윈도를 제작하는 사람들을 ‘윈도 드레서’라고 부른단다. 윈도 드레서는 주기별로 계속해서 바뀌는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온갖 기법으로 최대 광고 효과를 이루는 디자인을 창조해야 한다.


4. 짧게는 1주일, 평균 2주마다 트렌드에 맞는 디자인을 새로 해야 하므로 때로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단다. 한 매장의 쇼윈도는 내게 “여기서 사면 뭔가 달라”라고 말을 거는 듯해 들어가니, 모든 게 완벽했지만, 가격이 완벽하지 않았다. 자꾸 내게 외투를 추천해주는 직원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매장을 나왔다. 매니저처럼 보이는 직원은 나를 VIP 배웅하듯 뒤에서 인사를 해주는데, 부담스러웠으나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얼른 발길을 돌리며 당시엔 잘 참은 내가 조금 대견하다고도 느꼈다. 쇼윈도의 밝은 조명 아래 향기로운 FLEX의 냄새가 뭉근하게 공기 중에 퍼져 있는 것 같았고, 알뜰한 나들이옷 플렉스를 하고 싶은 나는 현혹되지 않고자 다짐했다.


5.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세라발레 아웃렛(McarthurGlen Designer Outlet Serravalle)’이다. 밀라노 근교 최대의 아웃렛으로 300여 개 브랜드의 상점이 있으며, 적게는 30%, 많게는 70%나 할인된 가격의 옷을 판매한다. 아웃렛으로 가는 버스에서부터 2, 30대로 보이는 한국인이 정말 많았다. 아웃렛 어딜 가나 한국어가 계속 들렸고, 8할은 한국인이었으며, 한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아웃렛 직원도 있었다. 나도 고민하다가 세일율이 높은 명품 외투를 하나 샀다. 카드를 긁을 때는 나도 모르게 작은 한숨으로 답했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나들이옷을 원가보단 싸게 잘 샀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6. 한 친구는 내가 나들이옷을 산 걸 알았는지, 귀신같이 다음날 학급에서 친한 친구들과 코모호수에 나들이를 가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좋다고 답했고, 옳다구나 하고 새로 산 명품 나들이옷을 걸치고 친구들과 만났다. 친구들은 모두 편한 옷을 입었고, 명품 외투로 가득 멋을 낸 나는 뭔가 잘못됐다 싶었다. 언제나 여유 가득한 나인데, 새 나들이옷을 입고선 느긋한 척도 못 하고 있었다. 호숫가에 가서 물수제비를 하는데, 혹시나 물이나 모래가 튀어 옷을 더럽히지 않을까 하며 조심스럽게 돌을 던지는 꼴이, 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7. 나는 남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인데, 가볍게 호수 산책하러 와서는 혼자 똥폼이었다. 아무래도 소풍 가면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관념에 집착했고, 모처럼 놀면서 휴식을 취하러 와서는 소풍을 즐기지 못하는 게 참 비합리적이고 아이러니했다. 괜히 나들이옷이 미웠고 탓하고 싶었다. 나들이옷은 실용적인 옷을 입고 내 마음대로 뒹굴 수 있는, 정말 편한 옷인데 말이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체면이나 모양새에 나 자신과 생활을 가두고 지내는 게 어디 나들이옷뿐일까.


8. 보여지는 게 꽤 중요하다고 말하는 어떤 사람은 내 글을 보고, 밀라노 진짜 부자들은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는 이탈리아 대학 중에서 두 번째로 비싼 IULM 사립학교이며 이탈리아 대기업 재벌 자제들도 많이 재학하고 있다. 그들 역시 소풍 갈 때는 정말 평범하고 편한 외출복을 입고 왔다. 학생이 입기에 가격대가 좀 비싼 이 외투를 환불하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 휴, 앞으로는 살면서 나들이옷으로 산 명품 외투를 입고 나들이에서 쭈뼛쭈뼛하는 내가 아니라, 좀 더 나에게 충실한 삶을 살게 하는, 명품 내면을 채우는 내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이전 11화 11. 유엔 국제기구 본부, “저 인턴 시켜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