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후손"··비자받던 미국인 '깜놀'

처격 조사 ‘에’는 없지만 ‘愛’가 있는, “한국 살고 싶어서”

by 김이곤


1. “한국 살고 싶어서”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미국에서 평생을 나고 자란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한국어다. 그에게 있어서 한국은 곧 삶 자체의 목적을 나타내는 것처럼 들렸다. 미숙한 한국어 탓에 처격 조사 ‘에’를 뺀 ‘한국 살고 싶어’라고 말했겠지만 말이다. 그토록 한국을 간절히 바란 사람이자 인상 깊은 취재원, 글렌 윈켈 씨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글렌 윈켈 씨는 나를 처음 마주하곤 ‘한국 살고 싶어서’라는 말을 했다.


▲외할아버지 얘기로 바쁜 글렌 윈켈 씨 (화면 : SBS D 리포트 캡처, 출처 : G1방송)

2. “살고 싶어서”라는 말처럼 삶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욕구를 드러내는 말이 또 있을까.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주연 배우의 멋진 고백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사랑해”에 이어 “너랑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인에게 있어서 ‘산다’는 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살고 싶어’라든지, 바로 어디에서 살 것인가 하는 삶의 그 장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3. 고려가요에 나오는 ‘청산에 살어리랏다’도 아닌, 대중가요에 나오는 ‘서울에서 살렵니다’도 아닌, 그토록 한국에 오고 싶어 한 글렌 윈켈 씨. 윈켈 씨를 만나러 가는 길. 춘천에서도 외곽, 아주 외딴곳에 집 한 채가 있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에 위치를 입력했는데, 아무렴 내가 길치인 건지.. 핸들을 몇 번이고 돌리면서 확신했다. 벌써 세 번째다. 커다란 나무를 두고, 동네를 몇 번이고 돌았다. 나는 괜히 모호하고 불안했다.


4. 약속된 시간에 늦지는 않을까.. 일찍 왔으니 망정이지, 그의 집을 잘 찾았다. 산에 둘러싸인 집 안에서 나를 맞이한 윈켈 씨. 그의 수수한 얼굴에 장난스러운 표정까지, 말투에서도 아무런 불안을 찾을 수 없었다. 사이클 선수 출신이라는 그의 말답게, 몸엔 군살 하나 없다. 악수하고 그의 집 거실 소파 자리에 앉았다. 그는 태블릿 PC를 하나 꺼내 들더니 자신의 어릴 때 사진을 보여주면서 말문을 열었다.


5. 윈켈 씨의 어린 모습 그 옆엔 한국인으로 보이는 노인 한 명이 서 있었다. 윈켈은 그의 외할아버지라고 설명했다. 외할아버지는 한국인이었고, 그는 자신의 뿌리가 있는 한국에서 살아보고 싶었단다. 그런 이유로 법무부에 재외동포 F-4 비자 발급을 신청했다. 하지만 2023년 12월, 법무부는 F-4 비자를 윈켈 씨에게 내어주지 않았다. 불허했는데, 그도 그럴만한 것이 전혀 자료가 없었다.


6. 재외동포 F-4 비자는 본인이 한국인이었거나 조상이 한국인이었던 사람의 후손이 신청할 수 있는 비자다. 입증 서류가 있어야만 하는데, 윈켈 씨는 아무것도 없었다. 윈켈 씨가 아는 정보라곤 외할아버지께선 9살 때 미국에 왔고, 신 씨 성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1903년 12월 5일에 부산에서 출항한 S.Doric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했다는 전언뿐이었다. 어디 신 씨인지도 몰랐다. 한국에서 다른 친척들을 찾아보려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7. 그런데도 그는 간절하게 한국에 살아보고 싶었다고 한다. 뭔가 운명처럼 강하게 자신을 불렀다고 말했다. 미국에 돌아가 외할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본격적으로 모았다. 미 전역을 돌며 미국시민권 신청서류도 찾았고, 외할아버지 성함이 담긴 가계도와 연대기도 직접 만들었다. 또, 하와이 대학에서 발간한 1903년 출항 자료 ‘Korean Passengers Arriving at Honolulu 1903-1905’도 손에 넣었다.


▲글렌 윈켈 씨가 직접 만든 신 씨 가계도

8. 발간자료엔 외증조할아버지가 부인과 딸 2명과 아들 1명을 데리고 부산에서 탑승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명시돼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행정사에게 요청해, 한국 법무부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행정사님이 큰 도움을 주셨다고 한다. 뉴스에 행정사님에 대해서도 인터뷰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행정사님께선 드러나기를 꺼리셨다). 제출한 서류로, 미국시민권 신청서에 적힌 인적사항이 하와이 대학 자료와 동일인임이 입증됐고, 법무부는 마침내 F-4 비자를 내줬다, 윈켈 씨는 비자를 받았을 때 꿈만 같았다고 회상했다. 한국에 가서 자전거도 타고 외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에서 살아봐야지 했단다.


9. 그런데 윈켈 씨는 법무부로부터 갑작스레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외할아버지가 한국의 독립운동가였다는 말이었다. 법무부와 보훈처는 윈켈 씨가 제출한 서류를 검토하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한 ‘신을노 선생’과 같은 사람이란 걸 확인했다는 것. 보훈처에선 이미 신을노 선생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서류를 검토하다 같은 사람이란 걸 알았다는 연락이었다. 독립신문 8페이지엔 너무나도 명확하고 진하게 ‘신을노’란 이름이 적혀있었다.


▲ 독립신문에 적힌 신을노 선생의 이름

10. 윈켈 씨는 물론 윈켈 씨의 가족들도 외할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다. 살아생전 독립운동에 대한 말씀은 일절 없으셨고, 한국에 대해서도 웬만하면 잘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신을노 선생은 지난 1919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미국에서 가구를 제작해 번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 독립운동단체들이 일제와 싸우기 위해 결성한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총지부에서도 간부급으로 활약했다.


11. 신을노 선생이 미국에 발을 내렸을 때, 그의 나이는 9살. 9살의 어린 나이에 동생들과 함께 미국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그렇게 고생해 가구점을 일으키고, 애국심 하나로 독립운동까지 한 신을노 선생이 자신의 외할아버지라고 말하는 윈켈 씨의 표정은 환하고 밝았다. 완전히 잊힌 영웅에 관한 이야기, 아니 알 수 없을 뻔했던 영웅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윈켈 씨는 그러면서도 한국이 참 좋다고 했다.


12. 입증할만한 자료가 없어 거절당했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강력한 이끌림에 그 자료를 모을 때 윈켈 씨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윈켈 씨의 외할아버지와 한국에 대한 사랑이, 한국에 살고 싶다는 의지가 곧 외할아버지 신을노 선생의 공로를 드러나게 하는 데 정말 큰 역할을 한 거다.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그 시선, 눈싸움이 아닌 정말 다정한 시선으로 그는 말했다. “한국 살고 싶어서”


13. 오히려 한번 불허를 받았기에, 자기가 자료를 더 잘 수집할 수 있었다며 그렇게 외할아버지의 공로가 드러났다며 윈켈은 호탕하게 웃었다. 어둠이란 시간이 없었다면, 별을 보는 것도 불가능해진다는 그런 의미였을까. 신을노 선생은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으로 살았다고 한다. 미국시민권을 거의 예순이 다 된 1953년에 신청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독립운동에 대해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은 신을노 선생께선 돌아가셨고, 이에 대해 알 방법은 없다.


▲글렌 윈켈 씨 인터뷰 도중

14. 다만 윈켈 씨와 대화 중에 추측을 해보건대, 하와이 독립운동이 분열돼 있다가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후에 하와이에서 무장독립을 지지했던 분들에게 비자를 주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다. 신을노 선생은 1955년 미국시민권을 받고서 한국 땅을 밟아보셨다고 한다. 가슴이 아팠다. 윈켈 씨는 기자인 내게 바라는 게 하나 있다고 했다. 이제라도 외할아버지의 공적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것과 한국에 남아있는 친척들을 찾고 싶다는 것이다.


15.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기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이야기를 전하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다. 이런 무게 있는 이야기를 전하기엔, 생각이 필요했다. 우리는 모두 생각까지도 말을 빌려한다고 한다. 모든 과거도, 경험도 이야기로 되어 버리고 꿈도, 미래도 이야기로 풀어진다. 오늘 윈켈 씨가 들려준 이야기가 유구한 역사가 될지, 한낱 뉴스에 잠깐 나오는 한낱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민이 됐다.


16. 재외동포 비자를 받던 미국인이 그 과정에서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임을 알게 되는 이야기로 뉴스를 제작했다. 이를 디지털 콘텐츠로 사람들이 흥미 있게 보게 된다면 이는 곧 신을노 선생의 업적을 알림과 동시에, 신 씨 친척들이 뉴스를 보고 연락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제작했고, 3월 1일에 맞춰 방영됐다. 유튜브 조회 수는 현재 75만 5천 회를 넘었고, 천 개가 넘는 댓글들이 달렸다. 검색창에도 신을노 선생에 대한 정보가 제작한 뉴스와 함께 올라왔다. SNS에서도 화제가 됐다.


▲ 글렌 윈켈(신대현) 씨가 방송 다음날 보내온 메일


17. 윈켈 씨는 뉴스가 나가고 한참 뒤에 내게 메일을 보내왔다.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로 적었고, ‘Great Story!’라며, 신 씨 가족을 찾기 위해 여전히 노력 중이란다. 그가 내게 보낸 메일엔 마침표가 없었다. 그 메일을 보며 한국에 대한 사랑, 그리고 윈켈 씨가 친척들을 찾고, 마침표 없이 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이 이어지길 바랐다. 최근에 윈켈 씨는 계속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언젠가 만날지 모르는 친척들을 만났을 때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싶고, 외할아버지가 썼던 언어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18. 남의 이야기를 전하고 말하는 직업, 기자다. 세상살이 말도 참 많지만, 인간미 넘치는 기자가 되고 싶다. 윈켈 씨가 말한 대로 정말 훌륭한 이야기를 전하는 기자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 또한 윈켈 씨가 “한국 살고 싶어서”라 말한 것처럼, 그게 곧 잊힐 뻔한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되살려낸 것처럼 말이다. 휴머니즘이 넘치는 사회와 세상을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기자가 되고 싶다던 내 초심처럼, 누군가가 나더러 왜 기자를 업으로 하냐고 물어본다면야, 답은 뻔하다. 처격 조사도 빼고 말하고 싶다.


“한국 살고 싶어서”,


글렌 윈켈 씨의 외할아버지 ‘신을노 선생’을 비롯해 많은 조상이 그토록 지키고자 한 한국 살고 싶어서, ‘나’보다는 ‘우리’라는 말을 더 즐겨 쓰는 한국, 그곳에 기자로 살고 싶어서, 난 앞으로도 더 많은 숨겨진 따뜻한 이야기를 듣고 전하며 살고 싶다.


처격 조사 ‘에’를 빼먹더라고 ‘애(愛)’가 가득한, 그런 이야기 말이다.


19. 다시 한번, “한국 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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