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먹은 기자의 최애 맛집

최애 맛집을 고민할 수 있다는 것

by 김이곤

간만에 음식·맛집에 대한 글을 써봤어요. 감사하게도 원고 청탁을 제안해 주셨는데요. 어디가 유명한지, 얼마나 줄을 서는지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기자인 제가 자주 떠올리는 한 그릇에 대한 글을 썼어요. 맛집이라는 말에는 전 늘 조금 멀어져 있었는데요. 그래도 유난히 힘든 날이면 한참 고민해도, 발길이 가는 한 곳이 있더라고요. 그런 집을 떠올리다 보니 '최애 맛집'이라는 말도 꼭 과한 표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최애 맛집은 어디인가요? 이번에 맛집 글을 쓰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군대 훈련소에서였어요. 다들 힘들다며 치킨 이야기를 할 때였습니다. 어느 치킨이 맛있다느니, 휴가 나가면 몇 마리를 먹겠다느니, 저더러 "너는 춘천 출신이니까 치킨 안 먹고 닭갈비 먹냐"느니 같은 별별 이야기가 다 나왔죠.


그때 동기 한 명이 말했어요. 자기 동네에는 치킨집이 딱 하나 있고, 그마저도 프랜차이즈는 아니었다고요. 거기 닭이 가장 맛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메뉴인지, 무슨 양념인지에 대한 설명은 못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치즈가루가 뿌려진 '뿌치킨'을 먹어본 적도 없다던 그 친구는 그냥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어디가 더 맛있는지'를 고민할 수 있다는 게 사실은 꽤 여유롭고 감사한 상태라는 걸 새삼 실감했습니다.


고민을 많이 해 힘들다는 건 바꿔 말하면 선택지가 많다는 걸로, 때로는 행복에 가깝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이번에 어떤 맛과 어떤 식당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조금 많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작년에는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던 날들도 있었는데, 올해는 이렇게 한 그릇을 떠올리며 글을 쓸 수 있었네요.


자, 저의 최애맛집을 소개합니다!


※ 방송기자연합회 격월간「방송기자」 1·2월호 기슐랭 파트에 게재된 글입니다.


1. 기자는 늘 핵심을 요구받는다. 군더더기는 빼고, 사정은 최소화하고, 사실을 최우선으로 남기라고 배운다. 현장은 늘 갑작스럽다. 왜 그곳으로 가야 하는지, 무엇이 명확히 문제인지는 도착해서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기자의 하루는 대부분 그렇게 ‘막’ 시작된다. 예고 없이 터지는 사건처럼, 등 떠밀리듯 취재 차 안에서 휴대전화부터 확인한다. 통화 기록, 문자, 메신저. 혹시 놓친 건 없는지, 또 다른 현장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2. 도착 전까지는 마음을 풀 여유가 없다. ‘막’ 생긴 현장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비어버린다. 잘 썼는지보다 다음 전화가 더 신경 쓰인다. 송고 버튼을 누르고 노트북을 닫아도 귀는 여전히 열려 있는 상태다. 집으로 곧장 가지 못하고 차를 한 번 더 몰게 되는 날, 그럴 때면 나는 춘천의 한 막국숫집으로 향한다. ‘샘밭막국수’는 기자에게 친절한 집이다. 이 집 막국수는 처음부터 화려하지 않다. 화려하지 않기에 언제든 금방 ‘막’ 먹을 수 있는 국수가 나온다.


3. 면은 막 굵지도, 그렇다고 막 가늘지도 않고, 양념은 조금 매운 감이 있지만 앞서 나서지는 않는다. 참기름 향이 먼저 튀지 않고 메밀 냄새가 천천히 따라온다. 고명도 삶은 달걀 반쪽과 김, 편육 한 점, 곁들임도 단출하다. 불필요한 수식어를 걷어낸 아주 잘 쓴 단신 기사 같다. 전은 바삭함보다 온기가 남고, 이 집 음식들은 자기주장을 길게 하지 않는다. 꼭 정 많은 강원 지역 사람들 같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오래 앉아 있어도 부담이 없다. 메뉴는 많지 않고, 주문은 빠르며, 설명은 길지 않다.



4. 현장에서 말을 너무 많이 하거나 애를 좀 쓰고 온 날엔 그 점이 특히 고맙다. 잠깐 기다리는 시간 동안 가게 안은 조용하다. 급하게 울리던 전화 대신 옆 테이블서 면치기 하는 소리가 들린다. 주방에서 국자 부딪히는 소리, 테이블을 정리하는 손길. 이곳에서는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조금 낯설기까지 하다. 막국수가 나온다. 투박한 면에 양념이 얹힌다. 한 젓가락을 들기 전, 잠깐 멈추게 된다. 오늘 하루를 인제야 좀 내려놓는 기분이 든다.


5. 글루텐이 없는 메밀 100%인 순메밀 막국수. 탱탱하거나 쫄깃함을 느낄 수 없는 그 순메밀 막국수에는, 처음에는 국수만 먹다가 이 시린 겨울에도 포기할 수 없는 찬 육수를 조금 붓는다.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마음이 덜 각진다. 면 사이로 국물이 스며들면서 맛이 조금 느슨해진다. 급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신호 같다. 기자는 종종 냉정하다는 말을 듣는다. 사람보다 사실을 앞세운다고. 사정을 알아도 기사에는 담지 않는다고. 그래서인지 우리말에는 이런 말이 있다. “국물도 없다.”


6. 그런데 막국수에 국물을 붓는 건 규칙 위반이 아니다. 맛을 해치지도 않는다. 다만, 조금 덜 빡빡해질 뿐이다. 모든 것을 계산하지 않아도 성립하는 선택이다. 기자 생활 2년 몇 개월이 조금 넘은 지금, 아직은 판단도, 거리도 자주 헷갈린다. 어디까지가 냉정함이고 어디부터가 무심함인지, 어디까지가 객관이고 어디부터가 회피인지 자주 고민하게 된다. 박절한 세상의 이야기를 전하다 보면 어느새 기자들 스스로 ‘국물도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7. 기자들 사이에서는 기사를 놓치면 “물 먹었다”는 말을 쓴다. 그래서 기자들은 물을 유난히 싫어한다. 괜히 더 빨리 뛰고, 괜히 더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괜히 국물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겨울의 막국수 앞에서는 살얼음 동동 뜬 그 물을 조금 다른 이름으로 불러보고 싶다. 오늘 현장에서 물 좀 먹었어도, 국수 그릇에 국물은 좀 부어 먹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기사는 놓치지 않으려고 늘 바짝 마른 채로 뛰지만, 사람까지 바짝 말라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8. 아직은 국물 조금 넣어 먹는 기자로 남고 싶다. 기사에는 냉정하되, 지역과 사람 앞에서는 한 숟갈쯤 여유를 남겨두는. 지역의 맛집은 맛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 지역을 버텨낸 사람들의 태도와 온도가 함께 남는다. 기자에게는 그 한 그릇이 다음 현장으로 가기 위한 잠깐의 쉼표가 된다. 완전하게 푹 쉬지는 못해도,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나설 수 있게 해주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샘밭막국수 강원 춘천시 신북읍 신샘밭로 644 1층 샘밭막국수 본점





※ 방송기자연합회 격월간「방송기자」 1·2월호 기슐랭 파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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