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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혜민 Apr 25. 2021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 가지는 우리의 다름

〈몸, 미래, 테크놀로지 : 《사이보그가 되다》읽기모임〉 후기

청년진로연구모임 사이랩(4.2LAB)의 2021년 상반기 독서모임을 마치며 쓴 후기이다. 사이랩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있다. https://fb.com/betweenlab  

※ 괄호 안 숫자는 책 《사이보그가 되다》의 종이책 쪽수를 의미한다.

2021년 4월 17일에 마지막 모임을 하는 "몸, 테크놀로지, 미래 - 《사이보그가 되다》 읽기모임"에는 다섯 명의 멤버가 있다. 머리가 길거나 짧고, 안경을 썼거나 안 썼으며, 성북구에 살거나 살지 않는다. 허나 공통적으로 청년이고, 여성이고, "취약한 몸, 손상된 몸, 의존하는 몸"(276) 에 대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모임의 존재 유무와 관계없이, 다섯 명은 이미 하나의 부류에 속한다. 하지만 "몸, 테크놀로지, 미래 - <사이보그가 되다> 읽기 모임"을 마치고 난 지금, 다섯 명 사이의 거리는 5주 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다. 혼자 책을 읽으며 감동하고-깨지고-충격 받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받고-스스로를 드러내고-생각을 정리해나가는 동안, 기어코 다같이 같은 장소에 불시착을 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무엇을 공유했는지 설명하는 방식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우리'가 되었는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우리는 "중립을 의심하자는 것"에 동의했다

유네스코의 <세계 교육현황 보고서>에는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 가지는 우리의 다름(differences)이다" 라는 제목 아래 그림 하나가 실려 있다고 한다. 100명의 학생들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들 중 일부 혹은 나머지는 장애가 있거나 가난하거나 특수교육 대상자거나 성 소수자거나 오지의 농촌 지역 거주자거나 다른 인종이나 계급의 소수자거나 여아일 수 있다. 보고서 제목대로, "모두는 모든 이를 의미한다". 누군가를 제외한 '모두'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격월간 <민들레> 134호에 실린 '포용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가 우리 모임에 참여하면서 배운 것을 요약하면 그 그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살면서 배운 '정상'은 허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매혹적이었다. '정상'이 될 수 있다면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았지만, 막상 '정상' 범주 안에 안착하기도 매우 힘들었을뿐더러, '정상'을 이룬 한 순간에도 삶이 극적으로 나아지지는 않았다. 끝에 끝까지 부정하고 싶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정상분포곡선'은 그저 아찔한 벼랑 끝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우리를 한심하게 여기지는 않기로 했다. 사회가 주입하는 이상적 인간상에 부합하고 싶다는 것은 사회적 동물로서 당연한 욕망일 테니까. 다만, 약간의 핀잔을 담아 따뜻하게 안아줄 수는 있을 것이다. 몰랐을 뿐이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정상성도 우리 모두를 포괄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러므로 '보편적'이라는 말 역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엔 다소 문제가 있다. "인류 역사의 보편은 언제나 매우 특정한 신체, 백인-남성-시스젠더-이성애자-비장애인-중산층으로 대표되는 중립적 템플릿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203)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몸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장애-소수자성-비전형성 을 생생하게 느끼며, 중립을 의심하는 것을 택했다. "가치 '중립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장애를 중심에 놓는 가치 '명시적' 디자인을 하자는 것"(203)이라는 김초엽 작가의 말에 동조하기로 했다. 장애 중심적 디자인은 얼핏 봐서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 디자인을 생애주기 중 언젠가는 필요로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모두를 위한 디자인' 아닐까?

이것은 어떻게 보면 나의 오랜 관심사인 민주주의와도 닿아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모두가 주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그저 '공평'하기만 하면 안 된다. 권력이 어디에 치우쳐 있는지 늘 날카롭게 점검해야 하고, 때때로는 적극적으로 어느 한 쪽에 힘을 몰아주어야 한다. "Black Lives Matter" 라고 외치는 사람들 앞에서 "All Lives Matter" 라고 외치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지하고 무책임한 일인가. '모두'에 정말 '모두'가 포함되어 있는지 따져보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는 "구체화되지 않은 낙관론은 현실의 고통을 축소해버린다"(87)는 말에 공감했다.

결핍이 해결되었을 때의 해방감을 느끼는 인간의 얼굴은 그 자체로 감동을 준다. 그 전까지의 고통을 보상받는 듯 느껴지는 찰나의 환희, 다들 인생에서 한 번쯤은 느껴봤고, 가능하다면 꼭 다시 느끼고 싶은 감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모임에서, 장애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결핍'이 아님을, 가까스로 이해했다. 김원영 작가가 짚었듯, "인간의 정체성 물음을 더 이상 종교나 정치가 아니라 과학이 답변하게 된 바로 그 시대"(61)부터, 장애는 해결 가능한 것이 되었고 가능하면 당장이라도 인생에서 치워버려야 하는 방해물이 되었다. 그럴 때의 과학은 "장애 그 자체의 의미를 규정하지 않는다"(60). 그래서 기술 덕분에 장애가 사라져 버린 광경을 묘사하는 광고에는 그 전까지 장애를 정체성으로서 인식하고 있었던 인간, '치료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매일 매순간 치열하게 고민했을 한 명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모임을 통하여, 더 이상 그런 광고들에 감동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 장애로 간주하는 것을 이후에 기술이 제거하거나 더 나은 상태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무언가가 장애의 자리에 있게 될 것"(276)이라는 통렬한 깨달음이, 우리를 바꿔놓았다. 장애를 해결 가능한 문제로 인식하는 사회, 매끈하게 제거되어야 하는 방해물로만 인식하는 사회는 끊임없이 멸시와 혐오를 재생산하며, 보다 '열등한' 다시 말해 '취약한-손상된-의존하는' 사람들을 바깥으로 밀어낼 것이다. 우리가 정말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온정과 시혜적 관점으로 가득한 광고를 보고 감동받는 대신, "장애를 고치는 약이 있어도 먹지 않겠다"(250)고 외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각자가 가진 손상을 해결하는 약이 있다면 먹을 것인지 서로에게 물었고, 그에 대한 서로의 대답을 들으며, 역시나 손상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님을,  "손상과 상호작용하는 사회 및 환경이 어떤 몸을 '장애화'하는 것"이며, 우리가 정말 해야하는 일은 손상을 마법처럼 없던 일로 만드는 기술을 희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손상을 장애로 만드는 사회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181)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우리는 기꺼이 의존하는 존재가 되기로 했다.

'사이보그'라는 상징을 통해 장애학을 만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디지털 네이티브에 가까운 우리들은 모두, 테크놀로지를 선망하면서도 한편으론 테크노페티시즘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현존하는 기술을 응용하고 활용해 삶과 결합하고 있는 더없이 주체적이고 당당한 장애인 사이보그들의 삶 역시도 "자신의 삶에 기술을 도입해 일상을 개선하면서, 동시에 기술과 불화하고 기술과 관련된 정상성 규범과도 불화"(144)하고 있다는 대목에서 오랫동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이보그가 되다> 후반부 대담에서 두 작가가 솔직하게 털어놓듯, 어떤 사람은 기술이 없는 채 존재하는 자신이 더 '온전하게' 느껴지고, 어떤 사람은 기술과 결합한 상태인 자신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몸에 대해 말할 때 더 이상 '한계'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되었다. 우리의 몸과 바깥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경계'일 뿐, 한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려 노력하기로 했다. 중요한 건 테크놀로지가 얼마나 발전하고 완벽해지는지가 아니다. 그것과 삶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겪는 조화와 불화가 진짜 핵심이다.

사이보그의 삶을 상상하기만 하면, 더없이 매끄럽고 반짝이고 유능해 보이지만, 실상은 매일 삐걱거리고 불안정하고 비효율의 극단을 달리는 삶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기계와의 결합만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인프라, 기술, 도구, 자연 모두"(346)와 결합하는 일은 모두 그렇게 불편하거나 불쾌하다. 그러나 "그 위험과 불일치 속에서만이 가능한 우정, 환대, 사랑과 연대의 만남들이 있다"(299). 때때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고민의 진창 속에 우리를 빠뜨렸던 우리 모임이, 결국에는 우리를 건져주고 뽀송하게 말려주고 따뜻하게 감싸주었듯이 말이다.

"장애인 인권운동가 김도현은 장애인운동의 목표란 자립이 아니라 연립을 기본적인 삶의 조건으로서 지향하는 것이라면서, 이때 자기결정권(자율성)이란 "여러 주체들이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의견과 판단을 소통하고 조율해가며 실현할 수밖에 없는 권리"임을 강조한다."(305) 적극적 주체로서 타인과 결합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도생이라는 방식이 얼마나 위기 앞에서 취약하게 바스라지는지 알고 있다. 이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위기와 우연들로 가득할 미래에는, 연립의 경험만이 인간을 지탱해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안에 존재하는 의존성을 인정하고, 가지각색의 주체들과 연립의 방법론을 실천할 줄 아는 기술이, 어쩌면 미래에 가장 필요한 테크놀로지일 수도 있다. 그전까지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착취하는 것이거나 막대한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돌봄'을 테크놀로지와 겹쳐 보며, 나이든 우리의 취약한 몸이 열어 주는 또 하나의 지평을 미리 살짝 내다보고 온 듯 마음이 술렁였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함께 다다른 지점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내내 생각했지만, 인상 깊게 남는 부분들조차도 사실 그렇게 처음 접해보는 생각들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찌 이렇게 신선하다 느껴졌느냐 하면, 서사가 치밀했기 때문인 것 같다. 저 생각 이 생각이 혼돈 속에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착실한 이정표로 적절하게 자리하고 있으니 책 한 권이 뿌듯한 여행처럼 미덥고 든든했다. 그리고 여행을 함께한 동료들에게 빚진 부분도 있을 것이다. 솔직하게 스스로를 드러내고 경험을 나누며 빈 곳을 채워주니, 마치 원래부터 잘 나 있는 길을 따라가는 것처럼 수월하고 즐거웠다. 우리의 모임 이후로 각자 또 어떻게 사유의 가지를 뻗쳐 나갈지 벌써 기대가 되고, 친구들이 걸어가는 걸음 걸음 앞에 꽃을 뿌려주고 싶을 만큼 응원한다.

'나 그리고 네 명의 멤버들'이었던 사람들이 '우리'가 되기까지 했지만, 여전히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 가지는 우리의 다름이다". 다름이 없었다면 환대도 우정도 배움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로 마음 편하게 다를 수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감사하다. 앞으로도 멋대로 살자. 경계는 있어도, 한계는 없으니까.


책 《사이보그가 되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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