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원작가의『시와 산책』을 읽고
어쩌면 집착으로 보이는 그녀의 걷기는 어린 시절 경험한 잠버릇 탓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걷는 동안 작가의 눈에는 화려함보다는 누추한, 외로운, 회색의 사람이 더 많이 들어온다. 시와 산책에서 작가가 안내하는 많은 장면에서 독자 또한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시인이고 작가이며 영화를 세 편이나 연출했다는 작가의 이력을 믿기에는 처음 만난 그녀의 글이 춥다고 느꼈다.
‘ 내 손을 오래 바라본다. 나는 언제 행복했던가. 불안도 외로움도 없이, 성취도 자부심도 없이, 기쁨으로만 기뻤던 때가 있었던가.’ 『시와 산책』(2020)
오월 하늘의 쨍한 에너지를 좋아하는 나와 작가는 서로 부대끼는 계절이 달라서일까. 그녀의 서늘한 표현에 나는 책장을 쉬이 넘기지 못했다.
‘ 자신의 존재를 걸어 말하는 이는 당연히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그의 시는 점점 짧아지고 침묵의 비중이 커진다.’『시와 산책』(2020)
나는 결국 작가와 친해지기를 포기했다. 작가의 고독과 우울이 나의 불면을 부추기는 것이 싫었다. 그렇게 지루한 숙제를 끝낼 무렵, 타우린을 한 뭉텅이 삼킨 듯 나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든 구절을 만났다.
‘ 그런 생각을 한참 골라보다가, 나는 침묵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그저 그녀와 같은 자세로 나란히 앉아 있기로 했다. 곁에 어두운 우물 같은 이불 한 채를 두고. 나에게는 낮이고 그녀에게는 밤인 시간이었다.’
‘진실을 모두 말해 하지만 삐딱하게 말해
......
진실은 차츰 눈부셔야 해
안 그러면 다들 눈이 멀지도 몰라 '
–에밀리 디킨슨- 『시와 산책』(2020)
친절을 가장한 채 폐쇄병동 소녀를 두렵게 했던 무리와는 결이 달랐던 작가 한정원, 그녀만의 공감비법을 보았다. 그녀는 침묵한 그림자로 소녀를 응원하고 있었다.
거기서 작가의 고독이, 나의 불면이 마법처럼 동시에 멈추었다.
칙칙했던 나의 어스름 길에 가로등이 밝혀졌다. 내가 이해하지 못해 뾰족했던 부분이 비로소 상냥하게 다가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작가 삶의 방식을 알아가며 나는 거꾸로, 거꾸로 책장을 넘겼다.
마침내 관심 없이 지나쳐버린 인파 속에서 아직도 맴돌고 있는 에밀리를 찾아냈다.
'칩거의 이미지가 씌워있지만 자기 테두리 안에서는 성실한 산책자였을 에밀리 디킨슨.'
『시와 산책』(2020)
살아서는 무명이었던 에밀리처럼 작가는 자취집 옥상에서, 시장에서, 숲길에서, 얼어붙은 강 앞에서… 언제나 침묵으로 위로를 실천하는 작지만 힘 있는 길을 걷고 있었다.
작가의 산책은 사랑 잃은 영혼이 상실의 대가로 품게 된 슬픔과 아픔까지도 나란히 걸으면서 위로하는 치유의 노래였다. 그녀의 걷기를 산책으로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나도 작가의 산책길을 따라 걸으며 내 옆에서 함께 걸을 당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