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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 Sep 04. 2023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를 읽고 있었다.     


오늘 안에 완독을 다짐하며 책을 대출하고 사십 분가량을 운전하여 내가 근무하는 병원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출근시간까지는 세 시간도 넘게 남았다. 내가 서둘러 출근한 이유는 책을 읽어야 하는 숙제 때문이었다.    

 

병원 건너에 새로 생긴 M카페가 싸고 가깝지만 나는 그곳을 지나쳐 좀 더 비싸고 먼 카페로 향했다. M카페의 가격경쟁력 때문인지 썰렁해진 E카페에는 달랑 한 테이블에만 손님이 있었다. 내 맘대로 자리를 고를 수 있어서 좋았으나 점주를 생각하니 마음이 쓰였다.     


책을 읽을 때는 커피가 꼭 필요한 나.     


EX. 사이즈의 커피를 고르고 저녁밥 대신 베이글도 한 개 추가, 키오스크로 주문을 마쳤다. 출근 전까지 내 시간을 온전히 책에 집중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달떴다.     

글쓰기를 지도해 주시는 P선생님의 권유로 《위대한 작가는 어떻게 쓰는가》 중 ‘이디스 위튼처럼 써라’ 부분을 읽고 이에 관한 글을 써내야 하는 숙제를 받은 지도 사나흘이 지났다.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오늘의 도전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책에서 위튼의 글쓰기에 대한 평은 간결한 문체가 돋보인다 했고 그의 대표작으로 1921년 여성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순수의 시대》를 예로 들었다. 결국 이 한 권이라도 정독해야 과제해결이 가능할 듯해서 오늘  잡아 여기 앉은 것이다.     

어렵지 않은 문장과 디테일한 상황 묘사를 보며 ‘친절한 글’이라고 느껴졌다. 나의 글이 불친절하다는 평을 많이 받아서일까, 바로 작가의 친절을 알아채며 점차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50대로 보이는 백인 남자와 십 대로 보이는 백인여자가 한국사람처럼 차려입고 카페에 들어왔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그들은 주문을 하지 않고 조용히 구석 자리에 앉았다.      


‘딸랑’ 문이 열렸다.

편해 보이는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 검은색 야구모자를 눌러쓴 젊게 봐주려 애써도 사십 대 이상으로 보이는 한국남자가 들어오며 여자와 아는 체했다. 늦게 온 남자가 여자를 불러 음료 세잔을 주문하고 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따님이 참 좋은 인성을 지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견례로 보기에는 여자는 어리고 한국남자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ᆢ’라고 생각하는 나. 어느새 나는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듣는 도둑관객이 되어버렸다.     


“따님은 친절하고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 점을 좋게 보고 있습니다.”     


여자는 아버지로 보이는 이에게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통역했다. 모르긴 해도 대충 러시아 쪽 언어로 들렸다. 남자의 말을 이해한 아버지도 무언가 말을 전했는데 처음 여자의 한국말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이 많은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아버지의 허락을 구하는 상견례 자리라고 생각하며 호기심 안테나를 높이 세웠다.     


“아버님이 허락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구나.’ 생각하며  이제 보던 책으로 눈을 돌리는데 남자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A를 제게 맡겨 주십시오. 훌륭한 선수가 되도록 키우겠습니다.”  

   

놀란 나는 대 놓고 그들을 쳐다보고 말았다. 상견례가 아니라 배구팀의 감독 선생님이 학부모에게 운동선수로 키워 보겠다고 허락을 구하는 자리였다. 아니 그런 일을 굳이 저녁시간에 카페에 까지 와서 할 일인가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세 사람의 표정을 보면서 그들의 진지한 토론에 나 역시 빠져들고 있었다. 감독 선생님은 짧은 시간 동안 학생을 보았지만 신체 조건이나 강한 정신력이 대성할 선수의 기본 자질을 충분히 갖췄다는 점에서부터 팀워크, 빠른 판단력, 무엇보다 우수한 두뇌를 가져 정말 탐나는 학생이라고 역설하는 중이었다.

중간중간 아버지는 돈이 많이 들지 않겠느냐 그럴 여유가 없다. 중간에 그만두게 되면 공부만 손해 보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딸을 통해 이어나갔다.


세 사람의 토론은 오래 계속됐고 나의 독서는 망했다.     


잠시나마 신파의 한 장면으로 오해한 내가 미안했다.

그러면서 내일로 예정된 공교육 멈춤의 날이 문득 떠 올랐다.     


지난 7월 극단적 선택을 한 초등학교 교사의 49재인 9월 4일 전국 교사들이 대규모로 연가, 병가 등 우회 파업에 참여하기로 한 날이다. 8월 31일 서울과 군산에서 초등 교사 2명이 세상을 떠난 데 이어 3일 오전 학부모 민원으로 스트레스를 호소하던 경기 용인시 한 고교 60대 교사가 숨진 채 발견됨에 따라 교사들의 추모 열기는 더욱 고조되고 있다.  

    

교육부에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추모는 뒷전이고 집회를  불법이고 위헌이라고 해서 파장을 키우고 있다. 누구를 위한 집회이고 무엇을 위한 외침인지 관심조차 없는 이 정부의 일관되게 냉정한 태도에 분노가 치민다.      

교육을 백년지 대계로 알고 군사부일체를 외치던 우리의 교육이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현실을 믿기 어렵다.  공교육을 대체할 사교육이 어디 있고 선생님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갑질 문화라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지금도 국민학교6학년 담임 선생님과 오십 년 가까이  안부를 나누고 있으며 내 딸 또한 이십 년 넘게 6학년 담임 선생님과 연락을 유지하며 서로에게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삶이 어려웠던 시간 사교육이라는 것을 생각도 못할 때 오롯이 선생님들의 가르침만으로 딸은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었고 손꼽히는 과학자가 되어 세계를 누비며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 공교육만으로 이룬 성공은 인간으로서 더 큰 행복을 느끼게 한다는 것을 어찌 설명해야 알아들을 런지.      


주최 측 추산 오십만 명의 교사가 모일 예정이라고 한다. 당연히 교사들이 없으니 학교는 하루 휴교나 대체수업으로 준비를 하는 분위기인데 교육부는 역시나 불법을 앞세우며 전수조사라는 말부터 하고 있다 압수수색이 먼저 안 나온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여론도 교사를 옹호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으로 갈려서 싸우고 있다.

평생 스승으로 모시는 선생님을 가지는 것이 행복인 줄 모르고 저들 입맛대로 폭력으로 조리돌림 하는 자들과 한 하늘을 이고 살기가 버겁다 느낀다.    

 

아이 하나의 지금과 미래 행복을 위해 인종 관계없이 사제라는 이름으로 저렇게 대화하는 평화로운 전경이 새삼 내가 읽는 순수의 시대보다 더 푸르게 아름다워 나는 결국 책을 접었다.     


곧 밝아올 아침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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