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sa Sep 07. 2023

웬수 같은 바나나

가난했던 시절, 에피소드라고 하기에는 잊을 수 없는 슬픈 사연이 있다.


  가난했던 시절, 에피소드라고 하기에는 잊을 수 없는 슬픈 사연이 있다.



그때도 늦은 봄이었다.

막냇동생이 태어난 지 일주일 되던 날 미국에 사는 아빠의 X 동생(시영 남매라고 불렀던 것 같다.) 가족이 다니러 왔다. 국제결혼을 한 작은 고모는 아들 둘과 딸이 있었다. 외국인을 처음 보는 내 눈에는 모두가 왕자님이고 공주님으로 보였다. 차림새도 시골 아이들과는 달랐고 특히 딸 제니는 열두 살 나이에도 화장하고 귀고리도 한 모습이 영 내 또래 아이들과는 달랐다.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제니와 나는 바로 친해졌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머무는 한 달 동안 우리는 각별한 사이가 되어 제니를 교실까지 데려가기도 했다. 


엄마는 출산한 지 일주일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 가족들의 수발을 들었다. 큰 고모 집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았는데 게다가 미국 손님을 보러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왔다. 하루에 셀 수도 없이 많은 밥상, 다과 상을 차려내야 하는 일은 엄마의 몫이 되었다. 그런 엄마가 걱정스러웠지만 딱히 내가 도울 일이 없어서 근심 어린 눈으로 엄마 주위를 맴돌았다. 심성 고운 엄마는 내색 한 번 없이 그 일들을 다 해내고 밤이면 끙끙 앓았다.     


정해진 한 달이 다 갈 무렵 어느 날이었다.

미국 고모는 서울에 다녀오면서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먹을 것들을 사 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햄버거, 소시지, 바나나,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깡통에 담긴 먹거리였다. 미국 아이들은 즐거워하며 그것들을 먹기 시작했다. 주변에 다른 아이는 나 하나뿐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것들이 궁금해서였는지 나는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제니가 제 엄마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행동으로 봐서는 바나나 한 개를 나에게 줘도 되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고모가 나에게 말했다.     


 “얘네 들은 비행기 타고 미국 가야 해서 이런 것 먹고 힘내야 하거든 네가 이해해라.”  

   

내가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갑자기 뻘쭘 한 기분이 들었다. 

그 상황을 엄마가 보고 있었다. 엄마는 조용  나를 불러 집에 가라 하셨고 나도 냉큼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마무리까지 마친 엄마가 돌아와서는 나를 위로하셨다. 사실 난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상황을 본 엄마는 마음이 많이 상한 듯했다. 

다음날 엄마는 큰 고모 집에 가지 않았다. 상황을 모르는 아버지는 며칠이면 갈 텐데 왜 가서 돕지 않느냐고 역정을 냈지만 한번 삐뚤어진 엄마의 마음을 돌이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뒤늦게 큰 고모가 와서 엄마와 나에게 사과했다. ‘어릴 적부터 저 하나밖에 모르더니 나이 먹고도 철딱서니가 없다고 올케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라’는 고모의 사죄 덕분인지 원래 고운 엄마의 심성 때문인지 결국 엄마는 그들이 돌아가는 날까지 수발을 들었고 이후에도 며칠간 이불 정리며 청소까지 도맡아 끝냈다.     

  

우리 집에서는 바나나를 '원수'라는 말과 붙여 쓴다. 

엄마는 이후에 바나나라는 말을 할 때마다 ‘웬수 같은 바나나’라고 하며 지금 그 사람들이 오면 바나나 한 트럭을 살 거라고 한 맺힌 진심을 말하곤 한다.


바나나를 그림으로만 알고 살던 그때는 그게 무슨 맛인지도 몰랐는데 나에게 바나나는 슬픈 과일이 돼버렸다. 몇 년 후 시내로 이사 와서 시장에 바나나가 보이면 엄마는 제일 큰 놈으로 한 송이씩 사 오곤 했다. 한풀이라도 하듯이.

그러나 딸이 바나나 앞에서 뻘쭘하던 그 모습은 영영 엄마 가슴에서 지울 수 없었는지 ‘웬수 같은 바나나'는 여전히 엄마의 레퍼토리가 되었고 찬란한 봄이 올 때면 여지없이 봄의 애상으로 남아있다.     


  

작가의 이전글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