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sa Nov 24. 2023

2021 나는 날개 벗은 천사로 산다

처음엔 그저 한몇 달쯤, 조금 더 길면 메르스나 사스 때 정도 시간이 흐르면 끝날 줄 알았다. 앞선 경험이 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을까. 세계는 아직도 코로나라는 괴물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 끝났나 싶으면 또 다른 얼굴로 소리 없이 다가오는 바이러스와의 전쟁.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일까 이쯤이면 지구를 구하는 정의롭고 용감한 누군가가 또는 어느 집단이 나올 만도 한데 코로나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버렸다.  

   

with corona라는 말이 등장했다. 결국 살기 위한 휴전에 돌입한 것뿐  전쟁이 끝난 것은 결코 아닌 현실.    

내가 아는 병원이라는 현장에서 보는 이 괴물은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힘을 또 모으게 만들고 있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이름으로 가족조차 모일 수 없는 시간.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 버려진 듯한 현실을 알아버린 노인들은 이미 삶을 포기한 듯 보였다. 웃음도 의욕도 삶이라는 희망도 모두 놓아버린 그들 앞에 한줄기 희망은 오직 휴대전화로 보이는 가족의 얼굴뿐이었다.          

질긴 목숨을 연명하던 어느 날 드디어 비접촉면회가 시작되었다. 휴대전화로 보던 얼굴을 조금 더 앞에서 실시간으로 본다는 것 이외에 서로 손을 잡아볼 수도 안아볼 수도 없는 것은 마찬 가지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환자의 상태가 면회 가능한 상태여야 했고 보호자와 약속을 잡고 만나는 절차도 까다로워서 보호자 역시 불만이 많았다. 거의 이 년 만에 처음 보는 부모인데 누군들 뒷줄에 서고 싶을까. 밀려드는 면회요청은 많지만 하루에 처리 가능한 인원은 고작해야 열 명 남짓이다. 면회가 병원의 주요 일과가 아닌 이상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실임을 이해시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매일 싸우기도 힘들어 병원인력도 지쳐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폐렴으로 고생하던 P어른의 열이 떨어지고 의식이 회복되었다. 벌써부터 면회를 요청했던 그의 막내딸이 제일 먼저 시간을 잡을 수 있었다. 딸이 오는 아침 어른은 눈이 반짝 빛났다. 뇌경색후유증으로 언어를 잃었지만 인지는 분명한 어른. 막내딸이 코로나시기에 아버지 없이 결혼했다는 것도 딸을 출산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기다리는 내내 노인의 눈이 반짝였던 건 눈물이었다. 간병사는 어른의 수염을 깎고 새 환의를 입히고 거울을 보였다. 막내딸에게 조금이라도 좋게 보이고 싶던 노인이 거울 속에서 미소했다.     


아직 입으로 식사를 할 수 없는 노인은 아침 경관 식을 삼키며 기운을 내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기쁜 기다림의 시간을 보는 의료진이 긴장했다. 아직 남은 몇 시간 동안 혹시 열이 다시 오르지는 않을까, 그러면 애써 준비한 모든 일들을 진행할 수가 없다. 간절한 마음 모아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막내딸은 채 오 개월이 안 된 딸아이를 예쁘게 입혀 유모차에 앉혀 놓았다. 곁에는 장인어른을 처음 보는 사위가 긴장이 역력한 모습으로 서있고 막내딸은 면회실 유리창에 바짝 붙어 병실로 연결된 듯 보이는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바퀴가 구르는 소리도 들린다. 환자용 침상에 누워 들어오는 아버지. 아버지가 들어오며 막내딸과 눈이 닿았다.  

        

  "아버지"  

   

막내딸의 말은 딱 그 한마디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후의 소리는 울음에 섞여 도통 알 수 없었으나 이를 보는 모든 이들이 동시에 같은 감정을 가지게 했는지 눈에는 같은 색깔 이슬을 맺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 년 전 기억에 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너무도 말라서 뼈에 가죽만 얹혀 놓은 듯했다. 눈만 살아 있었고 그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주치의를 통해 가끔 상황을 전달받기는 했지만 막내딸이 상상했던 아버지는 이미 거기에 없었다. 겨우 남아 있는 왼손을 천천히 들어 유리창 가까이에 대어 보는 아버지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한데 보고 싶었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하니 그 가슴이 얼마나 미어질지 보는 이들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 미안해, 아버지 내가 아버지 버린 게 아니란 거 알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올 수 없어서 나도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

  "……"

  "아버지 없이 결혼하고 아기 낳느라고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아버지 모르죠."       

   

딸의 통곡, 힘든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조금 참으라고 바깥쪽 직원들이 만류하지만 한번 터진 오열은 수습할 길이 없었다.

         

  "이렇게 울기만 하면 아버지가 맘이 아프셔요. 사위도 아기도 보여드려야죠. 시간도 짧은데."     

     

 막내딸은 그제야 정신이 들어 옆에 서있는 남편과 아기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처음 대면하는 장인의 야윈 모습을 보며 안타깝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사위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노인의 눈물이 사위에게로 향했다.  막내딸은 공갈젖꼭지를 입에 문 딸아이를 안아 올려 유리창 가까이에 보였다.   

       

  "아버지 한 번만 안아주면 안 되나."

  "선생님 아기 한 번만 아버지가 안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아기를 안고 호소하는 막내딸의 진심을 알지만 누구도 허락되지 않은 상황이라 그들의 소원을 이뤄 줄 수 없는 직원들 역시 안타까운 눈물을 따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P어른이 힘겹게 주머니에 넣었다 꺼내는 왼손에 만 원권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막내딸의 예쁜 아기를 향해 불편한 손 내밀며 나오지 않는 소리 대신 눈물로 아기를 축복하고 있었다.  막내딸의 오열이 더 커졌지만 직원들은 그 돈조차 전달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소독되지 않은 물품을 직접 전달하는 것도 규정 위반이었다. 미리 P어른이 뜻을 알았다면 소독기에 돌려서 줄 수 있는 일인데….  아쉽지만 다음 면회 할 때 전달하도록 돕겠다는 직원의 말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막내딸은 면회를 끝내야 했다.  

        

다음날 출근 한 나는 새벽에 심정지로 P어른이 사망하고 말았다는 비보를 들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손이라도 잡아보게 했을 텐데’라는 뒤늦은 아쉬움을 그저 눈물로 삼킬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펐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소천하는 순간까지 그의 왼손이 주머니에 있었고 지폐 한 장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이제쯤은 하늘에 들어 편안하실까. 예정의 다감했던 목소리로 막내딸의 귀한 아기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을까 라는 상상으로 어른의 하늘 길을 배웅했다.  병동으로 돌아오는 마음에 내내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떨치지 못했다.

     

코로나 이산가족, 이 슬픈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는 날 바이러스로 인해 피폐해진 모든 영혼에 남겨진 상흔을 감싸 안을 치료제가 있기는 한 걸까. 아직도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의 날 동안 만나야 할 또 다른 막내딸을 위해  나는 아직 벗어둔 날개옷을 입지 못하고 누추한 천사로 살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처서와 백로쯤에 서성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