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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 Nov 24. 2023

어쩌다 김장


엄마도 늘 그랬다.

배추 포기를 낟가리처럼 쌓아 놓은 날이면 매서운 바람이 불었고 꽁꽁 얼어 붉어진 손을 호호 불며 배추를 절였다. 허리가 휘도록 김장을 마무리한 밤이면 어김없이 눈이 내렸고 엄마는 겨울 준비를 끝낸 안도감을 뜨끈한 아랫목에서 달게 주무시는 것으로 표현했었다.     


팔십도 중반인 어른이 김장을 하신다며 전화를 하셨다. 배추 한 포기 나를 기운도 없는 분이 웬 욕심을 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제가 도우러 갈게요.”   

  

준비한 듯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백수라는 상황을 이미 알고 계시니 전화하신 어른에게 드릴 당연한 대답이었다. 요즘 한가한 아들이 참견을 했다. 힘드는데 왜 간다 했느냐 잔소리하는 아들에게  “도와줄래?”  했더니 입을 꾹 닫고 한숨 한번 내쉬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착한 아들의 끝판 왕이다.   

  

하늘이 끄물끄물하고 한기가 옷 속을 파고들던  아침 나는 아들을 동행해 김장하러 한 시간여를 운전해 갔다. 며칠 전부터 추워진 날씨는 김장에 딱 맞춘 잘 고른(?) 날 인듯했다. 소금물에 푹 절여진 배추더미가 물기 거둬진 채 우리를 반겼다. 얼마나 걸려야 끝날까. 살짝 현기증이 느껴졌다.     


“안 하려고 했는데 자네가 와 준다니 시작했지.”     


이건 웬 날벼락. 내가 돕겠다는 말을 안 했으면 노인이 고생을 안 했다는 말인데…. 아들이랑 잠시 마주친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와주러 온다던 다른 이는 오후에야 온다며 좀 쉬고 있으라는 어른. 산더미 같은 일을 두고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아들이랑 배추 나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한편에 가득한 무채는 선생님이 전 날 채 썰어 두신 거라고 했다. 파, 마늘, 생강, 양파, 새우젓, 생새우, 고춧가루가 의장대 도열한 듯 준비되어 있었다. 혼자서 그 많은 일을 하셨구나 생각하니 돕기로 한 것도 잘 한일 같았다.    

 

반소매티셔츠에 빨간 고무장갑을 낀 아들이 커다란 함지박 앞에 대기 중이고 어르신은 드디어 준비된 재료를 하나씩 눈대중으로 쏟아부었다. 작년에도 김치가 짜서 맛이 없었는데 이번 절인 배추도 짜게 되어 속상하다며 최대한 무채를 심심하게 해야 한다고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그 와중에도 젓갈은 강경 것이 맛있고 배추는 강원도 배추라야 한다는 노래는 세 번쯤 되풀이하셨다. 모든 재료가 투하된 함지박에 대기 중이던 아들이 포클레인 같은 팔을 움직이니 뚝딱 김치양념이 완성됐다.   

   

“아이고 아들 잘 키웠어. 요즘 어떤 아들이 엄마 돕는다고 김장하러 와주나. 잘 키웠네, 잘 키웠어.”     


미안함과 대견함을 쉴 새 없이 토하는 어른의 장단에 아들도 박자 맞추듯 웃어 주었다.      

솔직히 나는 김장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엄마가 김장할 때 옆에서 쌈 싸서 먹는 일이 전부였는데 아들이 장성한 후에는 기특한 녀석이 할머니를 많이 도왔다. 배추 속을 넣는 일도  척척이다. 음식 잘하는 아들 장가가면 사랑받는 남편이 될 듯.   

   

많던 배추가 얌전히 김치 통에 자리 잡으니 겉절이 김치와 깍두기가 순서를 기다렸다. 하는 척만 하는 나도 허리가 아픈데 도맡아 김장을 한 아이도 힘이 드는지 가끔 허리를 펴며 슬쩍 눈을 흘겼다.      


눈이다.


첫눈이 탐스럽게 내렸다. 김장하다 말고 고무장갑 벗어두고 나가서 사진 찍는 나를 보며 어르신은 ‘아직 젊네’라며 웃어 보이셨다. 여기저기 첫눈 소식을 공유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잘 삶아진 수육을 준비해 주신 덕에 몇 년 만에 제대로 된 보쌈을 먹었다. 아들 입에 한 쌈 크게 싸서 주면 맛있게 먹는다.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도와준다던 사람이 왔다. 늦은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을 터. 힘 모아 마무리하고 준비해 간 김치 통에 김장 한통을 담아 챙겼다. 애썼다. 고맙다. 아들 잘 길렀다. 속사포 랩을 하시는 어른도 흡족하신 듯했다. 목욕탕 가서 몸 푸시라고 준비해 간 봉투를 내밀었다가 야단만 실컷 맞았다.    

 

“ 사모님 내년에는 저 못 와요. 김장은 올해로 끝내고 편히 지내세요.”

“ 아이고 다시는 안 할 겨, 이걸로 내 인생에 김장은 끝이야.”   

  

단호하게 끝이라던 그 말씀을 과연 믿어야 할지.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 댁에 가서 김장을 도운 날. 있으면 잔소리한다고 일찌감치 쫓겨난 선생님을 뵙지 못한 것이 서운했지만 두 분이 저녁 내내 우리가 함께한 김장을 주제로 이야기 꽃 피우며 행복해하시면 좋겠다. 사모님이 억지로 돌려준 봉투는 아들의 일당이 되었고 사흘 내내 아프진 않느냐며 걱정 가득한 어른의 전화를 받았다.      


"제가 뭐 한 게 있어야지요. 그래도 내년엔 진짜로 김장하지 마세요."


첫눈이 내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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