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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 Dec 17. 2023

눈 내리면 아빠가 보고 싶다




새벽부터 내린 눈이 세상을 덮은 아침. 집 근처 오솔길 향해 서둘러 걸었다. 숫눈길을 보고 싶어서였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에 서니 지난겨울 큰 눈이 내렸던 풍경이 오버랩되었다. 변하지 않는 백색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내 마음 묵은 때가 벗기는듯했다.

아무도 범하지 않은 눈길은 언제나 아름답다.  눈길에 상처 낼까 멀찌감치 서서 바라만 보고 돌아왔다.  

자동차 보닛 위에 얹혀있는 눈을 뭉쳐서 작은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이 내리면 가끔 동심으로 돌아간다. 



   


평소에는 무뚝뚝한 아빠가 겨울에는 한 번씩 놀이 친구가 돼주었다. 손재주가 좋아 맥가이버 부럽지 않았던 우리 아빠. 고장 난 무엇이든 아빠 손에 들어가면 살아 나오는 놀라운 기적이 아빠에게는 일상이었다. 난 아빠라면 누구나 잘하는 줄로 알고 살았다. 막상 결혼해 보니 형광등도 내 손으로 갈아야 하는 상황이 있다는 걸 그때야 알았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아빠는 사과 궤짝을 분해하고 굵은 철사를 숫돌에 갈아서 썰매를 만들어 주었다. 사포질 하고 니스까지 발라준 특별한 썰매. 꽁꽁 얼어붙은 개울가에 온 동네 아이들이 각양각색 썰매를 들고 왔지만 단연 돋보이는 내 썰매에 우쭐했다. 밥때를 지나도 모르고 놀다 보면 뺨이 얼었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콧물이 줄줄 흘렀다. 장갑 낀 손등으로 슬쩍 문질러 닦고는 아무렇지 않게 추위를 즐기던 기억이 아련하다.       

정월보름이면 액막이 연을 만들어 주던 아빠. 창호지를 모양내서 자르고 대나무를 가늘고 얇게 깎아서 만든 아빠표 방패연. 연을 들고 뒷산 바람 골에 날리면 방패연이 짧은 꼬리를 나풀거리며 높이 높이 올랐다. 내 맑은 웃음소리도 연을 따라 올랐다.       

   

행복했던 기억, 흑백영화 같은 장면이 나이가 들수록 선명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움. 세월 따라 그리움도 커지는 걸까.   

          

'유구읍 명곡리' 산골에서 엄마와 둘이 지내던 동안 아빠는 예쁜 기억을 남겨주려 애썼다. 여름내 나무를 건조해 장작을 만들고 한편에 줄 맞춰 세워두고 흐뭇해했다. 가을이면 감을 따서 처마 끝에 대롱대롱 달아 두었다. 곶감이 만들어지면 겨울이 시작됐고 산골 아궁이에는 군고구마와 군밤이 나를 기다렸다. 아빠는 늙어가는 딸을 보며 그제야 딸 바보가 됐다. 언덕에 통나무를 끌고 다니며 눈을 다져서 눈썰매장을 만들었다. 비료 부대 깔고 앉아 미끄럼 타다 굴러서 멍이 들어도 마냥 행복했던 시간이 계속되길 바랐는데.       

   

야속한 세월은 단거리 선수처럼 뛰어갔다.

유월 어느 날 마지막 눈인사를 끝으로 아빠는 떠났다. 해마다 겨울은 돌아오는데 아빠는 돌아오질 않으니, 우리가 만나려면 내가 갈 수밖에 없나 보다.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헤어져 있는 세월 동안 더 많이 다정한 딸 바보가 되어주면 좋겠다.    

  

눈 내리는 날의 센티멘털이 아버지가 구워주셨던 군고구마 냄새를 더욱 그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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