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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칼의 도시, 팔렌케 유적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17

by Segweon Yim

행복한 고고학자 루이예르


팔렌케 유적이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조사된 것은 1773년이라고 하고 1780년대에는 측량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유적 지도가 제작되었다고 하니 유럽인들이 새로 발견된 대륙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대한 관심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유적의 사진 촬영도 이미 1858년에 이루어졌다고 하고 많은 조각 작품들에 대한 도면과 석고를 사용한 복제 작업도 19세기 말에 이루어졌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무 뒤에 보이는 계단과 건축물들이 파칼 왕의 무덤이 있는 비문의 사원이다.

그러나 고고학적 방법을 통해서 유적의 조사를 본격적으로 한 사람은 알베르토 루스 루이예르 (Alberto Ruz Lhuillier라고 한다. 팔렌케 유적으로 들어가서 길가 풀밭에 있는 루이예르의 묘는 매우 인상적이다. 나는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지만 한눈에 이 묘의 주인이 유적을 조사한 고고학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묘의 형태가 멀리 보이는 고대 석조 건축물과 닮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묘에 새겨진 이름 위에 고고학자라는 표기가 붙어 있었다.


그는 비문의 사원으로 이름을 붙인 피라미드에서 이 팔렌케 고대 도시를 건설한 파칼 왕의 무덤을 발견하였다. 루이예르는 이 왕묘를 발견하고 조사함으로써 죽어서도 그가 조사한 유적을 떠나지 못하는 영원한 팔렌케 사람이 되었다.


파칼 왕의 무덤이 있는 비문의 사원을 처음 조사한 루이예르의 무덤


루이예르가 조사한 파칼 왕묘의 피라미드를 비문의 사원이라 부른다. 그것은 피라미드의 석실 안에 당시의 역사를 기록한 석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석판 기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파칼 왕의 석관에 덮인 뚜껑이다. 이 뚜껑의 기록은 물론 그림문자로 된 것이며 한 때는 해독이 되지 못하고 우주인과 연관된 그림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페루의 나스카 지상 회화도 우주인의 작품으로 해석되고 있으니 불가사의한 고대 유적을 보는 사람들에게 우주인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파칼왕의 무덤이 있는 비문의 피라미드 앞을 이 땅의 원주민 상인이 지나고 있다.


비문의 피라미드는 아홉 단계의 석축으로 구성되었고 중앙에는 69 개의 계단이 있어 위의 건물로 올라갈 수 있다. 69개의 계단은 파칼의 나이를 나타낸다고 하며 9단의 석축은 죽은 뒤 사후의 세계로 가는데 통과해야 하는 아홉 단계의 지옥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파칼의 무덤은 위의 석조건물 안에서 다시 밑으로 통하는 비밀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이러한 건물 구조를 보면서 파칼의 장례식을 상상해본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파칼의 시신을 높이 들고 저 높은 계단을 오르는 장례행렬이 얼마나 장엄하고 화려했겠는가?


비문의 사원 피라미드 위에 있는 석실의 하나


왕의 무덤은 피라미드 아래쪽에 만들었고 위에는 순장당한 신하들의 묘로 가려져 있어서 루이예르가 발견하기 전 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루이예르가 피라미드 위에서 밑으로 내려가는 비밀 계단을 발견하고 지하의 묘실에 누워있는 파칼 왕을 보았을 때 파칼 왕은 얼굴에 푸른 옥의 마스크를 쓰고 역시 푸른색의 옥으로 만든 여러 겹의 목걸이가 가슴을 덮고 있었다. 그는 죽어서 옥수수의 신으로 되었다고 한다.


돌 위에 누워있는 파칼을 본 순간 루이예르의 가슴은 얼마나 뛰었을까? 이 글을 쓰면서 무녕왕릉의 현실을 막은 돌벽을 허물고 현실 안을 놀란 눈으로 들여다보았을 김원룡이 생각났다. 고고학자가 발굴 현장에서 느끼는 이러한 순간의 기억은 그 옆에 있던 사람도 잘 알기 어려운 묘한 데가 있다. 죽어서도 자신이 발굴한 파칼왕의 유적을 바라보고 있는 루이예르는 진정 행복한 고고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문의 사원 피라미드 위에 있는 석실의 하나. 파칼 왕의 석실은 여기서 다시 피라미드 속의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


폐허에서 다시 건설된 왕궁


팔렌케 유적에서 가장 뚜렷한 랜드마크는 왕궁이라는 이름의 유적에 있는 높은 망루형 건물이다. 이 고층 건물은 전체가 4개의 층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망루였는가? 아니면 높은 곳에 올라 천문을 본 것인가? 알 수 없다. 이 높은 타워는 유적의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상징적 랜드마크이다.


왕궁 유적은 팔렌케 유적의 한 복판에 있고 유적의 앞으로는 수십 개의 계단 밑으로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그러나 중앙부의 계단 옆으로 모두 여섯 층의 계단식 석축이 남아 있어 중앙의 계단이 있는 곳도 본래는 이 계단식 석축이 연결되어 있었으리라는 것이 추측된다. 곧, 높직하게 올려진 신전과 망루 등의 건물들은 계단식 피라미드 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쪽 광장에서 본 왕궁 유적
궁전 유적과 비문의 피라미드 사이에는 유적과 함께 건설된 대형 수로가 지나간다.


마야의 대부분의 건축물은 피라미드 위에 올려져 있고 그것은 반드시 신전이 아닐 수도 있음을 여기서 보게 된다. 광장에서 올려다 본 정면 다섯 칸의 기다란 석조건물과 그 뒤로 우뚝 선 망루는 누가 보아도 여기가 이 왕국의 지도자가 거처하는 곳임을 직감할 수 있다. 왕궁 아래의 광장에서는 중요한 제일에 거창한 축제라도 벌어졌을까? 아니면 엄숙한 종교적 제의나 왕의 즉위식이 거행되었을지도 알 수 없다.


이 엄청난 규모의 석조 건축물들을 건설한 사람은 파칼 왕이다. 파칼이 왕궁을 건설하기 이전 팔렌케 왕국은 이웃 나라의 침공을 받아 왕족들도 모두 살해되고 왕궁도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파칼이 폐허 위에 다시 왕궁을 세운 것은 나라가 망한 지 40년이 지나서라고 였다.


왕궁 안의 타워가 하늘 위로 우뚝 서 있다.


그가 왕이 된 것은 열두 살 때였다고 하는데 그는 자신이 왕족임을 입증해야 한 것은 물론 왕권을 확립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652년에 왕궁을 짓기 시작하여 힘든 토목공사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그는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 자신을 정통성을 부여받은 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립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내용은 왕묘에 있는 비석으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왕궁의 구조 또한 지상과 지하로 나뉜다고 한다. 이는 지하에 신성한 공간을 따로 만들어 지옥을 상징하고 지상은 현세를 의미하며 또 하늘로 오르는 천상의 세계를 상징하는 각각의 공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우주의 구조를 압축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4층의 타워는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인지도 알 수없다.



망루를 둘러싼 왕궁 내부의 건물들
왕궁 내부의 한 건물 기둥에 역사적 기록으로 보이는 부조가 가득 새겨져 있다. 왕궁의 주인공인 파칼이 왕위에 오른 것이 열 두살 때였다고 하니 사진 속의 소년 정도였을 것이다.

대형 부조로 남은 전쟁 포로


왕궁 유적의 한쪽에는 눈길을 끄는 다섯 사람의 부조상이 있다. 이 부조상은 전쟁 포로로 잡혀온 인근 나라의 죄수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다섯 인물 중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특별히 관심을 끌었다. 그는 돌의 색깔도 다른 인물이 흰색인데 비해 짙은 갈색으로 되어 있어서 멀리서도 뚜렷하게 구분된다. 이는 돌의 표면이 풍화 또는 오염으로 인해 변색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본래 돌의 색깔로 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인물이 주목되는 것은 무릎을 꿇고 있기 때문이다.

포로의 안뜰에 있는 인물 부조상


이 유적에 대해 특별한 지식이 없어서 무릎 꿇은 인물만 전쟁 포로인가 아니면 다섯 모두 전쟁 포로인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왼쪽 첫 번째 인물의 가슴에는 태양신으로 보이는 목걸이가 장식되어 있고 머리도 나머지 네 명과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또 왼팔의 자세도 다른 네 명과 왼쪽 인물과는 완연하게 다르게 표현되어 있어서 왼쪽 인물은 그 오른쪽 네 인물과 신분상으로 서로 구별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새겨진 인물들이 전쟁 포로들이라고 해서 이 작은 안마당을 포로의 안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대형 부조로 영원히 남겨진 전쟁 포로라니, 포로 대접 치고는 지나치게 융숭하지 않은가?


무릎 꿇은 인물상과 태양의 얼굴 장식을ㅁ늑걸이로 걸고 있는 인물의 세부


세계수의 상징 부호, 십자가


유적 안의 여러 건축물들은 모두 계단식 피라미드 위에 서 있다. 이들은 대부분 독자적으로 존재하지만 십자가의 사원처럼 여러 사원 건물이 하나의 지역에 모여 있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의 사원이다. 십자가의 사원은 하나의 사원 유적 이름이기도 하지만 태양의 사원, 잎이 많은 십자가의 사원 등과 함께 하나의 단지 안에 모여 있는 복합 유적의 이름이기도 하다. 십자가의 사원에서 볼 수 있는 십자가 이미지는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나무, 즉 마야 신화 속의 세계나무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러한 세계수 관련 신화는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단수도 같은 유형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어서 우리에게는 비교적 친숙한 편이다.



십자가의 사원
밑에서 올려다 본 십자가의 사원. 이 사원은 해골의 사원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정면의 한 기둥 밑 부분에 해골의 조각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사원 내부에서 내다보이는 풍경
유적에서 하루를 보내는 원주민 어린이와 일상적 삶의 터전인 원주민 상인

현재까지 조사된 유적은 전체 유적의 5퍼센트에서 10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유적의 경계선에서 한 걸음만 들어가면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 밀림이다. 이 밀림 속에 지금까지 250년의 긴 세월 동안 조사한 것의 열 배도 훨씬 넘는 유적이 숨겨져 있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십자가의 사원에서 조망한 판렌케 유적. 끝없이 이어지는 원시림 너머로 숲의 지평선이 아득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 후로도 그냥 숲 속에 묻힌 채로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조사로 밝혀진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상당한 양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기록은 남겨놓는다는 마야인들의 훌륭한 전통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파칼 왕의 비문 하나만 해도 얼마나 위대한 기록인가?


그 기록에 더해서 파칼 왕의 무덤 뒤로 이어지는 어두운 숲 속에 감추어진 어마어마한 역사가 있다는 사실은 마야의 후예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지 않을까? 궁금한 것을 밝히기 위해 묻혀 있는 것을 파헤치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마야의 유적에 한하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멕시코는 이 깊은 숲을 파헤치지 않아도 집 짓고 살 땅이 많다는 것은 큰 복 중의 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적이 끝나는 곳에서 한 발자국만 들어가면 하늘이 보이지 않는 밀림이다. 이 어두운 숲 속에 팔렌케 유적의 90퍼센트가 묻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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