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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Jul 22. 2021

마야 에필로그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28

                                                                                                 위 사진 : 와하카 교외 미툴라 유적


도대체 마야인은 누구인가?


처음 멕시코시티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마야에 대해서 완전한 백지상태였다. 그래서 멕시코시티를 돌아보면서도 눈에 마야가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마야라는 말 자체를 잘 파악할 수 없었다. 마야에 관한 이런저런 글들을 읽어보아도 마야의 개념을 알기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멕시코와 그 이남의 과테말라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지역의 콜럼버스 이전의 문화를 마야 문화라 하고 그 지역에 사는 토착민들을 마야인으로 부르는 듯하다. 그러니 나도 그렇게 알고 쓸 수밖에 없다.


그 지역의 전통문화들을 세부적으로 보면 아마도 나름대로의 차별성이 있을 것이며 문화 또는 민족도 세부적으로 분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부적인 차별성이 무시되고 마야라는 애매한 명칭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마도 서구인들의 눈에 비친 것에 의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지역에 들어온 서구인들의 눈에 각 지역의 문화적 민족적 차이가 보이지 않았을 것은 당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와하카 시내 산토도밍고 성당 앞의 자카란다 나무


마야의 냄새를 좇아서


그러나 이 지역의 토착민들은 스스로 마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멕시코 남부를 여행하면서 그 지역의 전통문화나 고대 유적을 보면서 그냥 마야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마야에 대해 잘 이해해서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니었다.


처음 멕시코에 도착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마야였지만  멕시코시티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온통 마야만 눈에 들어왔다. 길가의 자카란다 나무에 핀 보랏빛 꽃과 여인들이 입은 검은 양털 치마에서도 온통 마야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사실 멕시코시티에서도 나는 숱한 마야를 보았었다. 땅 속에서 발굴된 아스텍 유적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 멕시코의 미술 속에도 마야는 많이 있었고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에도 마야는 있었다. 내가 잘 몰라서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심장은 사람의 생명과 사랑을 상징, 하지만 마야인의 심장은?


테오티우아칸에서 툴룸 유적에 이르기까지 숨 가쁘게 돌아본 마야의 고대도시유적들에서 머릿속에 가장 크게 남아 있는 것은 피라미드이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피라미드는 제왕의 무덤이었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한 사람의 무덤이며 그 무덤을 위해 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을 희생하여 만들어 놓은 불가사의한 축조물인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부터 중국 지린성 지안시의 압록강변에 있는 태왕릉에 이르기까지 피라미드는 무덤이었다. 그러나 마야의 피라미드는 무덤이 아니라 신에게 인신공양 의식을 치르던 제단이자 그 신을 모신 신전이었다.

몬테알반 유적의 구기 경기장

테오티우아칸 유적에 들어서면서 나는 비로소 거대한 피라미드를 내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것들은 너무 어마어마해서 그 정체를 살펴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와하카의 몬테알반에서 카리브 바다에 붙은 툴룸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대도시 유적은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서 있었다. 피라미드 옆에는 구기장도 빠짐없이 존재했다. 구기장에서는 구기 경기가 열렸고 경기의 패자는 피라미드 위에 올라가서 자기의 심장을 자랑스럽게 그들의 신에게 바쳐야 했다.


어떤 설에는 승자의 심장을 바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경우에도 심장을 신에게 바치는 영광을 쟁취하기 위해 경기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러한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죽음의 제단으로 뛰어드는 것이 나 같은 무신론자에게는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구자들이 그렇게 주장한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는지는 알 수없다.


멕시코시티 템플로 마요르의 아스텍 신전 유적. 피라미드로 올라가는 계단 일부가 남아 있다.

성모 마리아조차 토착화한 마야의 힘


그러나 마야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긍지 또한 엄청났다. 가톨릭의 토착화, 제국주의에 저항한 독립전쟁, 근대 이후 현재까지 이어져 온 농민들의 투쟁은 그들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이 도처에서 드러났다.


그들은 스페인에서 들어온 성모 마리아를 과달루페 성모라는 멕시코 농민의 버전으로 바꾸었다. 과달루페 성모는 멕시코를 스페인에서 독립시켰고 지금도 농민들을 살벌한 신자유주의 무역전쟁에서 지켜내고 있는 중이다.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의 차물라 마을에서 본 저항의 역사는 마야인들의 역사와 전통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가를 실제 주민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차물라 마을의 산 후안 성당 외벽에 마야인들의 전통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유럽에서 들어온 성당 건물이 마야의 전통으로 묶여 있는 셈이다.


마야의 땅에서 맡은 고구려의 냄새


여러 유적에서 마주했던 마야의 건축은 놀랄만했다. 지붕 위의 소위 루프콤(Roof Comb)의 존재를 이해한 것은 몇 곳의 유적을 거친 이후에야 가능했다. 루프콤은 건축을 높고 크게 보이게 하여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로 인해 건물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건축을 뒤덮은 부조 장식의 뛰어난 예술성은 종교적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나에게도 폭력적인 햇볕의 공격조차 멈추게 할 것 같았다. 건물들은 대체로 아래 위로 나뉘는데 아래층이 사람들의 활동 공간이다. 위층은 올라가 본 곳은 없지만 정면 프리즈에 가득 붙어 있는 신상들로 보아 내 눈에는 신의 공간으로 보였다. 지붕 바로 밑이나 2층과 1층의 연결부위 등은 빗물이 아래로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오목하게 만들거나 추녀 같은 모양으로 돌을 다듬는 등 섬세한 설계도 볼 수 있었다.


마야인들의 금성을 비롯한 별과 태양의 관측도 여러 유적의 건축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마야의 유적들은 당시 마야 사람들의 정신세계와 우주관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얽힌 계급의 문제나 한 지역 안에서의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 등이 이리저리 얽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다만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기만 할 수밖에 없다.


금성을 관측했다는 치첸잇사의 비너스 제단


마야의 유적 중에 특히 잊지 못할 곳은 고구려의 냄새를 풍기는 보남파크 유적이었다. 그곳에서 보는 이를 압도한 거대한 비석들의 위용과 화려한 색채의 벽화는 한국사람에게는 마치 중국 지안에서 보던 바로 그 비석과 벽화무덤의 숨결을 느끼게 하고도 남았다.


그곳에서 보았던 마야인들의 기록문화는 정말 대단했다. 그러한 비석과 벽화는 다른 유적에서도 만날 수 있었긴 했지만 보남파크 처럼 한꺼번에 몰아서 보여준 곳은 없었다. 그들의 벽화는 나라 사이의 전쟁과  왕위 계승과 귀족들의 신에게 피를 바치는 풍습 등을 생생하게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여주고 있었다.


보남파크 유적의 거대한 비석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순례자들


내가 본 것은 산이었나? 꽃이었나?


주마간산(走馬看山)이란 말이 있다. 말 타고 지나가면서 산을 본다는 말이니 그저 대충 거기 산이 있다는 것이나 알고 지나친다는 말이다.


이 말을 중국에서는 주마간화(走馬看花)라고 한다.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과 예비신부가 결혼 전에 서로 상대방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런데 신랑은 한쪽 다리를 절었고 신부는 한쪽 눈이 멀었다. 이에 둘을 소개한 중매인이 신부에게 안 보이는 한쪽 눈을 꽃으로 가리고 길가에 서있게 했다. 또 한쪽 다리를 저는 신랑에게는 말을 타고 그 길을 지나가게 하여 길가에 있는 신부를 보라고 했다. 신부는 말을 탄 훤칠하게 생긴 신랑을 보고 흡족해했고 신랑은 꽃을 들고 있는 신부의 예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 다 꽃만 보거나 말만 보고 실체는 보지 못한 셈이다.


마야 유적을 돌아보고 생각난 말이 바로 위의 주마간산 또는 주마간화이다. 내가 본 것은 산이었는가? 아니면 꽃이었는가? 산에 있었을 나무와 돌은 기억에 없고 산 그림자만 어른거릴 뿐이다. 얼굴을 가린 꽃은 생각나는데 꽃 뒤에 있었던 그녀의 맑은 눈이 감겨 있었는지 어떤지는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마야의 그림지라도 볼 수 있었음은 행운이었다.


멕시코에서의 몇 장 안 되는 기념사진 중 하나. 욱스말 유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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