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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Aug 22. 2021

사회적 포용의 도시, 리마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30

남미의 대문


카리브해의 아름다운 도시 칸쿤에서 다섯 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페루의 수도 리마.  멕시코 칸쿤에서부터 나를 괴롭힌 페루는 리마 공항에 도착해서도 나를 그냥 두지 않았다. 칸쿤에서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내 발목을 그리 붙잡더니 이번에는 짐을 찾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다른 짐들이 다 없어질 때까지 내 짐이 나오지 않았다.  


컨베이어 옆에 내가 타고 온 아비앙카 항공의 데스크가 보였다. 짐이 안 나왔다고 하니 안내 직원이 내 짐 표를 받아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설마 가방이 없어지진 않았겠지 하면서 한숨 돌리는 사이 그 직원이 내 가방을 들고 웃으면서 나타났다.  '쏘리'하고 웃는데 말을 할 줄 모르니 나도 웃으며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 소리만 하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페루 와서 처음 한 스페인 말이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말이 저절로 실감 나게 느껴졌다. 이래저래 페루는 대문에서부터 나를 힘들게 했다.


깨끗하게 정비된 라 유니온 거리. 아침이라 아직 많은 가게들이 닫혀있다.


면적으로 보면 남미는 유럽의 거의 두 배에 가깝다. 그러니 남미 여행을 간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남미 여행은 코스가 일정하다. 소위 대표적 여행지라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 가는 것이니 그 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리마는 남미의 대문이다. 남미를 여행하는 사람은 일단 리마에서 내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잉카의 수도였던 쿠스코로 떠난다. 곧 리마는 쿠스코로 가는 경유지인 셈이다. 쿠스코에서 다시 남미의 여러 곳으로 연결된다.  


근위병 교대식이 열리는 대통령궁 앞. 교대식은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구경거리지만 현지인에게는 그냥 재미없는 일상일 뿐이다..

3월 13일이니 삼월 중순에 들어섰다. 무지하게 더웠던 멕시코보다는 낫지만 여기도 여름 날씨이다. 그래도 더워서 다니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니 낯선 거리를 걷는 느낌이 괜찮았다.  저녁 먹으러 나선 구도심의 거리는 꽤나 번화했다.


 관광안내서에 나오는 리마의 구도심은 바닷가에 새로 들어선 신도시 미라플로레스 구역에 비해 지저분하고 관광객에게는 위험한 곳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러나 저녁을 먹으러 나선 리마의 중심지 구도심은 생각보다 깨끗했고 밝았다.


침략자에겐 군대를 위한, 원주민에겐 명상을 위한 광장


유럽인들이 건설한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로 도시의 중심은 광장에서 시작된다. 멕시코에서는 어데를 가나 소칼로 광장이 있었다. 소칼로는 주춧돌이란 뜻이다. 독립기념비를 세우려다 주춧돌만 세운채 중단된 것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그것은 그대로 멕시코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런데 남미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광장의 이름은 아르마스(Armas)이다. 아르마스는 무기 또는 군대라는 뜻이다.  


관광객들 만이 한가로이 걷는 한낮의 아르마스 광장.  뒤의 노란색 건물은 시청사이다.


스페인 통치자들이 도시를 건설하면서 군대를 주둔시킨 넓은 장소를 광장으로 만들고 그곳을 중심으로 도시를 건설했다. 그래서 도시의 한 복판에 있는 이 광장의 이름이 무기 또는 군대를 뜻하는 아르마스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잉카 지역을 대표하는 언어인 케추아어로는 이 광장을 아우카이파타(Haukaypata)라고 한다. 아우카이파타는 명상을 의미한다는데, 광장을 뜻하는 두 어휘로 정복자들과 원주민들의 광장에 대한 관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광장은 현지인을 통치하기 위한 군대 주둔지였고 원주민들에게는 이 넓은 광장이 명상과 사색의 공간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스페인 식민지 지역의 어느 도시에서나 광장 둘레에는 대성당과 대통령 관저가 있다. 광장을 만든 것이 스페인 통치자이니 그들의 신을 모신 대성당을 짓고 그들이 원주민을 통치하기 위한 총독의 관저를 지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 총독 관저가 오늘날 대통령 관저로 바뀌었을 뿐이다.


한국의 청와대도 일제의 총독관저였음을 생각해보면 식민지에서 독립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청와대가 총독관저를 벗어나서 조금이라도 빨리 세종시로 옮기기를 고대한다. 먼 데까지 와서 좀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잉카제국의 몰락을 가져온 리마 대성당


리마 대성당의 정면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20대의 나이에 신대륙 탐험대인 발보아 함대에 들어갔고, 파나마 지협을 가로질러 1513년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태평양을 발견한 탐험가였다. 그는 태평양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페루로 들어갔으며 1532년 잉카제국을 침략하여 황제 아타우알파를 체포했다. 황제는 두 개의 방을 금과 은으로 가득 채워 피사로에게 바쳤으나 이듬해 결국 처형당했다. 2년 뒤 1535년에 피사로는 태평양 연안에 리마시를 건설했다.  


리마의 중심에는 아르마스 광장이 들어서고 이제부터 남미대륙의 모든 원주민들이 받들어야 할 성모 마리아를 모신 대성당이 들어섰다. 리마 대성당은 이후 수백 년에 걸쳐 더 크게 확장되고 또 여러 차례의 지진으로 무너져 다시 지어지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광장의 분수 너머로 보이는 대성당의 종탑

피사로는 1541년 잉카제국 정복 후 잉카의 수도 쿠스코를 차지하기 위한 내부 분쟁 과정에서 살해되었으며 머리까지 잘린 채 대성당 바닥에 묻혔다. 그의 머리가 들어있던 납으로 된 상자가 발견된 것은 1977년이었으니 죽은 지 436년이 지나셔였다. 그리고 1985년 1월 16일 그의 유해는 금빛 관에 담겨 그가 지은 성당 안에 안치되었다.

리마 대성당 안에 있는 피사로의 관


침략자와 독립영웅의 공존


광장에는 피사로의 동상도 있었는데 1990년대 말경 리마 지식인들과 시민들이 원주민 학살과 잉카의 침략자 동상이 리마의 중심광장인 아르마스 광장에 있으면 안된다고 여론을 일으키자 결국 철거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이제 남미인들의 마음 속에 주체적 세계관이 굳게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리마 대성당 앞길에서 남쪽으로 라 유니온 거리를 따라 다섯 블록을 내려가면 산 마르틴 광장이 나온다. 광장 한 복판에는 산 마르틴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산 마르틴 장군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지만 당시는 남미는 모두 스페인의 영토로 한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산 마르틴은 스페인과 맞서 남미의 각 지역을 독립시키는데 일생을 바쳤다.


페루는 1821년 스페인에서 독립되었다. 그는 각 나라들이 스페인에서 독립된 후 정치적 욕심을 갖지 않고 프랑스로 가서 여생을 마침으로써 지금까지 남미 민중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지금 그의 유해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산 마르틴 광장과 아르마스 광장을 잇는 라 유니온 거리는 리마 구도심의 가장 대표적인 번화가로 서울 구도심의 명동이나 비슷하다. 페루의 침공자 피사로가 누워 있는 리마 대성당의 아르마스 광장과 페루를 독립시킨 산 마르틴 장군이 이 도시의 대표적 거리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산 마르틴 광장의 산 마르틴 장군 기마상

생각해보면 두 사람 모두 스페인에서 온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스페인 왕명으로 페루를 정복하고 총독이 되고 대성당을 지어 토착민들의 정신세계까지 후려낸 사람이고 한 사람은 이 지역을 다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킨 사람이다.


그런데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존재는 무엇인가? 이 땅에 수천 년 살아온 원주민의 세상인가? 아니면 피사로 이후 이 땅에 들어와 살던 유럽인들의 세상인가? 역사는 참으로 복잡한 모순덩어리이다.


그래도 산 마르틴 동상이 아르마스 광장의 중심에 서 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온 이방인의 지나친 생각인가?


박물관이 된 리마 대성당


대성당은 이제 미사를 올리는 성당이 아니라 박물관이 되었다. 중앙 제단의 양 측면과 뒷면까지 상세히 볼 수 있고 내부 측면의 열네 개의 예배당과 여러 성인의 유품들도 볼거리가 되지만 나에게는 지하에서 발견된 두개골들이 훨씬 더 흥미로웠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곳에도 성당은 무덤으로서의 기능이 대단히 크다. 피사로의 무덤이기도 하지만 이름 없는 수많은 유골들과 사제의 복장을 한 시신들이 매장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리마 대성당의 중앙 제단


죽어서 성당에 들어앉을 수 있는 자는 그가 살았던 그 시대에 대단한 권력자의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피사로는 400년이 훨씬 넘어서야 겨우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역시 그가 살았던 시대의 대표적인 권력자였다.


지금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두개골들 역시 과거의 힘 있는 자들이었거나 이 성당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승려들이었을 것이다. 한 때 누렸을 영광도 명예도 권력도 이제는 이름표 없는 한낫 뼈 조각으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 전시된 진열품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뼈를 앞에 대할 때면 뭔가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과거사들로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대성당 지하의 매장된 인골들과 두개골들


현대 속의 고대, 우아카 우아야마르카 피라미드


리마는 피사로가 건설한 구 도시와 해안에 새로 건설된 산 이시드로, 미라플로레스 등 신도시로 크게 나뉜다. 현재 신흥 고급 주택가나 상권의 대부분은 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산 이시드로 지역의 한 복판에는 거대 피라미드 유적이 있다. 흙벽돌로 축조된 계단식 피라미드인 이 유적은 1942년 발굴이 시작되어 아직도 진행 중이다.


피라미드 기저부와 중턱의 계단 위에는 발굴 구덩이들이 파여 있고 최상부에는 1958년에 발견된 장례의식의 일부인 미라들이 발굴 당시의 상태로 복원되어 있다. 피라미드의 주된 용도는 제단이었지만 여러 세기에 걸쳐 분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발굴결과 A.D. 200년에서 1530년대까지의 연대가 밝혀졌다.


우아카 우아야마르카 피라미드의 일부. 밑바닥에 아직도 발굴 중인 발굴 구덩이가 있고 뒤로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고층 아파트군을 배경으로 하여 눈앞에 우뚝 선 피라미드는 우선 황토로 이루어진 거대 축조물이라는 것에서 놀라움을 느낀다. 흙덩어리로 피라미드를 쌓다니. 그러나 리마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지만 세계 3대 사막도시의 하나이고 건조한 지역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건조한 사막성 기후가 48개의 미라들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라들은 대체로 A.D. 1300년 경으로 편년 되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면 발견될 때까지 700년가량의 오랜 세월을 지켜온 것이다.


신도시 고층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피라미드가 있다.

미라들은 대부분 피부가 남아 있고 땋은 갈래 머리 등 당시의 헤어스타일까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미라들과 함께 도자기나 농경 도구들, 또는 악기와 직물 등이 풍부하게 출토되어 기록이 없는 시대의 생활의 역사를 생생하게 남겨 놓았다. 중국 우루무치의 신쟝위구르 자치구 박물관의 미라실이나 투루판의 고분 전시관에서 뜨거운 모래밭 속에 감추어진 고대 문화 유물을 본 적이 있다. 그때의 감동이 멀리 태평양 건너 리마의 아파트 단지 안에서 다시 살아나다니.


정상부에서 발견된 미라의 일부. 마치 살아있는 듯 앉아 있다.

망각은 죄지은 자에게 면죄부를 준다


내가 리마에서 꼭 보고자 해서 수첩에 적어놓은 곳은 '기억, 관용 및 사회적 포용의 장소(Lugar de la Memoria, la Tolerancia y la Inclusion Social; 약칭 LUM)'라는 박물관 한 곳 뿐이다. 이 긴 이름의 박물관은 20세기에서 21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페루의 독재 치하에서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사람들의 유물과 기록을 전시한 곳이다.


리마 미라플로레스 구역 북쪽 해안 절벽 위에 마치 전쟁 때의 지하벙커 같은 모양의 박물관으로 독재 치하의 많은 증언들을 들을 수 있고 기록을 열람할 수 있다. 특히 생존자나 피해자의 가족들이 대형 모니터에서 증언을 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이런 현대사의 질곡을 기록하고 보존하고 또 일반에 공개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곳에 전시된 끔찍한 사진이나 밀매장한 어린이의 유품 등 독재권력의 만행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물들이 아니었다.


박물관 여기저기 진열장 앞에서 말없이 그 진열품들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 학생들 때문이었다. 그렇다. 거기 있었던 10대나 20대는 그 참혹한 역사를 겪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것은 먼 과거가 아니라 자기들의 부모들이 몸서리치도록 겪었던 무서운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 학생들의 시대가 오면 이러한 어두운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임을 그곳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밖에서 보면 마치 2차 대전 때의 토치카처럼 보이는 독재 치하의 자료 박물관 '기억, 관용 및 사회적 포용의 장소'

그 자료들을 겉핥기로 훑어보는 동안, 나는 줄곧 내가 초등학교 입학했던 50년대 초부터 대학 선생을 시작하던 80년대에 이르는 길었던 우리의 역사떠올리고 있었다.


서대문 형무소의 전시관을 학생들과 함께 찾았던 나는 그곳에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의 기록밖에 없었음을 보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람을 끝내고 나와서는 이승만 박정희 시대, 특히 박정희 독재 치하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숨져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길게 해주어야만 했다.


헤드폰을 쓰고 독재정권 피해자의 증언을 듣는 젊은 학생. 그 뒤는 커다란 모니터 속에서 증언을 하는 피해자.

이제 우리도 박정희 전두환 시기의 어두웠던 역사와 광주 민주항쟁의 세계사적 민주 투쟁사를 제대로 전시하고 미래세대에 보여주는 그런 박물관을 가질 때가 되었다. 아니 이미 늦었지 않은가? 지금도 독재세력의 잔재들이 살아남아 한국 정치와 사회 경제의 주류를 이루고 큰소리치는 것을 보면 자주 억장이 무너지곤 한다.


전시장 벽에 붙은 한 장의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페루 현대사에서 부패세력의 상징처럼 알려진 대통령 후지모리의 지명수배 포스터다. 후지모리는 망명생활을 전전하다가 칠레에서 체포되어 25년 형을 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이 포스터의 밑에는 인상적인 글귀가 적혀 있다.


"면죄는 망각 속에서 유지된다"


밀매장한 어린이들의 무덤에서 나온 유품들. 어린이들까지 죽여 밀매장한 정권의 잔학함은 어떻게도 표현할 길이 없다.

어두운 역사는 태평양 속으로 가라앉고


LMU 앞에는 광활한 태평양이 펼쳐져 있다. 박물관을 나오니 해가 수평선 밑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하늘에는 옅은 구름이 끼어 있었고 그 구름을 통해서 붉은 기운이 부드럽게 하늘을 물들였다. 반쯤 물속으로 들어간 해 옆으로 희미하게 산 그림자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그것은 마치 해와 한 덩어리로 묶여서 함께 태평양 속으로 침몰하는 듯 보였다. 그 땅에 묻혀 있을 페루의  어두운 과거도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저무는 해를 배경으로 관광객의 자전거가 지나간다.

기억, 관용 및 포용의 장소는 그렇게 해가 잠겨 들어간 태평양 바닷가 언덕에 아직도 우뚝 서 있었다. 저 붉은 해가 다시 안데스 산맥에서 떠오르면 페루는 이제 밝고 활기찬 민주의 역사 만이 전개되리라 믿는다.


페루의 밝은 미래를 기원한다.


LUM 앞의 바다로 가라앉는 해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과거의 역사를 몽땅 껴안고 깊은 태평양 속으로 잠기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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