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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Sep 12. 2021

지하수로로 이어 온 고대문화, 나스카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32

이카에서 나스카로


이카에서 나스카로 가는 길은 모두 사막이다. 차창 밖으로는 삭막한 모래산들이 멀리 가까이 흘러간다. 그러나 사막이라고 해서 모두 모래와 바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아시스가 아니어도 모래산과 모래산의 사이에는 낮은 계곡이 있고 계곡에는 강이 흐른다. 강 유역에는 온갖 채소와 과일이 난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이런 계곡은 산과 산의 사이, 그리고 넓은 고원 한 복판을 파서 만든 운하처럼 바짝 다가가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지역 최대의 강인 리오 그란데가 사막 사이를 가르며 흐른다. 강변의 비옥한 충적대지는 이 지역 최대의 농업 창고 구실을 한다.


그래서 사막의 푸른 계곡은 낯선 여행자에게 신비함 그 자체이다. 이카를 벗어나면서 이따금씩 만나는 계곡에서는 포도밭이 보였다. 이곳이 페루에서 유명한 포도주의 산지라는 것을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서 어느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이카를 벗어나면서 넓게 전개되는 평원의 끝에서 벽처럼 겹겹이 막힌 산고개에 올라서면 제법 넓은 초록의 세계가 펼쳐진다. 리오 그란데 강이다. 리오가 강이라는 뜻이니 그란데 강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우리가 부를 때는 리오 그란데 자체가 강 이름이다. 강가의 넓은 퇴적 평야가 사막의 숨통처럼 시원하게 느껴졌다.


리오 그란데 강변에 있는 포도 농장 뒤로 황금빛 모래산이 누워 있다.


차가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너고 팔파를 지난다. 팔파는 이카와 나스카를 잇는 길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도시라 하기에는 한국의 읍 소재지 정도에 불과하지만 팔파가 유명해진 것은 최근 팔파의 땅그림이 발견되면서부터이다.  팔파의 시내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나스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이 도로 위에 걸려 있어서 여기서부터 나스카가 시작됨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스카 초입의 팔파를 지나는 길에 걸린 현수막. "나스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글에서 땅그림이라고 하는 것은 영어로 지오글립스(geoglyphs)라고 한 것을 번역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말로 표현한 글을 본 적은 없으나 바위에 새기거나 그린 것을 바위그림(rock arts, petroglyphs)이라고 하니 땅에 새겨 표현한 것을 땅그림이라고 못할 것은 없겠다.  


팔파를 지나면서부터 도로 좌우는 넓게 펼쳐진 모래밭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나스카 땅그림이 집중 분포된 나스카 평원이다. 그러나 차창에서 본 평원에서 땅그림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림들은 도로에서 육안으로 보기에는 너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팔파와 나스카 사이의 도로 양쪽으로 펼쳐진 나스카 평원. 나스카의 땅그림이 있는 곳이다.


빨래터의 수다로 읽는 나스카 고대문화



먼지바람이 불어대는 나스카 시내는 황량했다. 거리의 상가도 그리 생기를 느낄 수는 없었다. 버스 터미널 부근에만 여행객들과 택시 기사들 그리고 작은 호텔에서 나온 사람들이 손님을 끄느라 좀 복잡했는데 그곳만 벗어나면 거리는 한산했다.


도시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도 30분이 안 걸릴 정도이다. 바둑판처럼 짜인 도로에서는 어느 쪽을 보아도 그 끝에는 붉은 모래산이 막혀 있었다. 이곳이 사막 한 복판의 분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도로의 끝은 어디나 모래산으로 막혀 있다.


모래벌판에 새워진 이 도시는 고대로부터 사용되어 온 지하수로에서 공급되는 안데스의 눈 녹은 물로 살아간다. 이 물은 농경, 식수 등으로 이용되어 나스카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물이다. 지하로 연결된 관개수로를 칸타욕 아케둑트(Cantalloc Aqueduct)라고 한다.  


시가지 동쪽의 어느 뒷골목에서 시끄러운 아낙들의 수다 소리가 들렸는데 가까이 가보니 지하로 움푹 꺼진 빨래터였다. 하천석을 돌려 쌓아 만든 큰 우물처럼 생긴 빨래터는  깊이가 약 2미터가량 되어 보였고 밑바닥 한쪽으로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이 바로 지하 관개수로 즉 칸타욕 아케둑트가 지상으로 연결된 것이다.


빨래터가 된 시내 뒷골목의 고대 수로 유적 칸타욕 아케둑트


수천 년 전부터 이용된 칸타욕 아케둑트는 지금까지도 나스카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이어지고 있었다. 빨래터는 우리나라의 여늬 빨래터처럼 마을 아낙들의 수다로 시끌벅적하다. 아기들이 엄마 옆에서 물장난을 하고 강아지 한 마리가 빨래터 위에 올라앉아 그녀들의 수다에 귀를 기울인다.


아낙들의 수다는 삭막한 듯해도 여기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나고, 사람 사는 곳 어디에서나 만나는 따뜻한 인심이 살아있는 곳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우물에서 빨래를 하던 아주머니 한분이 카메라를 보고 웃는다.


벽화 속의 할머니 마리아 라이헤 노이만 여사


시가지를 천천히 걷다가 어느 네거리의 벽에 그려진 나이 든 할머니의 얼굴을 발견했다. 얼굴 옆에는 "나스카 평원의 여인, 마리아 라이헤 노이만"이라고 쓰여 있었다.


마리아 라이헤 그로쎄-노이만(Maria Reiche Grosse-Neumann,1903, 5, 15 – 1998, 6, 8)은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가정교사일을 하기 위해 간 페루에서 땅그림 연구에 평생을 바치고 명예로운 페루인이 되었다.


라이헤 박사가 나스카의 길가 담벼락 속에서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이 늙은 얼굴의 초상화는 노인이 되어 죽을 때까지 페루인으로 살다 간 라이헤가 페루인의 진정한 친구였음을 말해준다.

그는 미국의 폴 코속이라는 역사학자의 조수가 되어 소위 나스카 라인이라고 부르는 땅그림의 연구에 뛰어들었다. 이후 그는 나스카 땅그림의 괄목할만한 조사와 연구 성과를 내고 "선의 여인(Lady of the Lines)"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여기서 '선'이란 땅그림을 구성하는 선을 이르는 것이다.


그는 나스카 땅그림을 연구하는 것은 물론 보호에도 앞장섰고 훼손을 막기 위해 땅그림이 있는 곳에 집을 얻어 살기까지 했다.  1955년 페루 정부는 아마존 강물을 끌어와 나스카 평원의 관개사업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라이헤는 이에 맞서 나스카 땅그림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고 드디어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항상  웃고있는 간판 속의 남자 옆에서 파리만 날리는 옷장수 아저씨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것이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이다. 지난 20년 가까이 반구대 암각화 보존 운동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있던 나는 라이헤의 나스카 땅그림 보존의 투쟁 결과를 눈앞에 보면서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마리아 라이헤라는 이름은 나스카의 공항을 비롯하여 50개가 넘는 학교와 기관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길거리 한 모퉁이 시멘트 벽에 그려진 마리아 라이헤의 초상은 그가 얼마나 페루인에게 친근한 진짜 페루인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그가 살던 집은 그의 연구결과를 전시한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이번 여행에서 그곳을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트로피가 된 사람의 머리


시가지의 동쪽 끝에는 안토니니 교육 박물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박물관이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박물관은 이태리 연구팀의 조사 결과를 가지고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박물관은 겉보기에 매우 허술했으나 내용은 놀랄 만큼 풍부했다.


안토니니 교육박물관의 정문. 들어가려면 초인종을 눌러야 된다.


나스카의 땅그림은 물론 바위그림에 대한 여러 정보도 볼 수 있었지만 내 눈에 가장 크게 들어온 것은 트로피 헤드(trophy head)라고 부르는 사람의 머리였다. 트로피란 전리품이라는 뜻이다. 이 머리들은 전리품으로 획득한 전쟁포로들의 것인가? 그러나 이 명칭은 서양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추측으로 만든 말일 것이므로 신빙성은 없다.


머리는 피부가 붙어 있는 것도 있고 두개골만 남은 것도 있었다. 진열장 안의 머리 모양은 멀쩡하게 보였는데 두개골을 잘라 뇌를 빼내고 속에 헝겊 등을 채워 넣어 얼굴 형태를 유지시킨 것이라고 한다. 이마 쪽의 뼈에 구멍을 내서 끈을 길게 묶었는데 이것은 손에 들기 좋도록 했거나 아니면 어떤 벽이나 장대 같은 물체에 매달기 위한 것일 수 있다. 끈은 직물과 머리카락을 이용하여 짠 것이다. 이로 보아 이 머리들은 어떤 제의적 행위에 사용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트로피 헤드. 꽉 다문 입과 정면을 보고 있는 눈이 인상적이다. 눈은 없으나 눈동자 자리가 뚫려 있어 마치 산 사람의 눈 같은 느낌을 준다.


목은 잘리고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오직 머리로만 남은 사람. 나스카의 대표적인 고고학 유적지인 카우아치 유적에서 출토된 이 머리들은 머리 하나를 담을 만한 크기의 단지 속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머리가 없는 시신들이 다른 무덤 속에서 나왔다. 이들은 머리 따로 몸 따로 묻힌 것이다. 카우아치에서는 잘린 머리, 또는 잘린 머리를 들고 가는 사람들이 그려진 도기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박물관의 유물 중에는 겉과 속에 모두 그림을 그려 넣은 도기들도 흥미로웠는데 썩지 않고 원형 그대로 출토된 직물들도 관심을 끌었다. 사막 기후에서만 볼 수 있는 유물이다. 직물 중에는 가로 세로가 3미터는 족히 될 듯한 대형 직물이 눈에 띄었다. 현장에서는 진열장 안에 수평으로 들어 있는 것이라 한 번에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다.


사람의 머리를 붙인 독수리. 머리는 목이 하늘을 향한 채 거꾸로 붙어 있는데 그것은 눈과 입이 거꾸로 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혹시 바로 앞에서 본 목이 잘린 머리가 아닐까?

집에 돌아와 조각조각 찍은 사진을 이어 붙여 한 장으로 완성한 사진을 보니 녹색의 넓은 천에는 독수리 형상을 짜 넣었는데 놀랍게도 머리가 사람의 머리였다. 사람의 머리는 거꾸로 선채 독수리의 목에 붙어 있었고 사람 자신의 짧은 목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혹시 이것은 트로피 헤드와 관련 있는 것은 아닐까?  트로피 헤드를 본 이후 모든 유물이 그와 관련 있는 듯이 보이기 시작했다.

겉과 속에 모두 무늬를 새겨 넣은 도기. 오른쪽 깨진 토기 표면에 트로피 헤드의 그림이 있다. 두개골에 줄을 꿰어 늘어뜨린 것까지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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