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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Oct 22. 2021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36

쿠스코 행 야간 버스


가능한 한 여행 중에 밤 버스를 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밤에 장거리 버스를 타는 것은 하룻밤 호텔비를 절약한다거나 하루 낮시간을 아끼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밤에 버스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엄청 피곤한 일이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새벽에 내려 호텔에 체크인을 해도 그날 계획한 일정을 수행해야 하니 쉬는 것도 마음대로 안된다. 더구나 버스 창으로 보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없는 것은 가장 큰 손실이다.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 출발한 지역에서 도착하는 지역까지 지리 환경이나 사람 사는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마치 대하소설의 요약본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나스카에서 쿠스코로 가는 버스는 밤에 출발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출발부터 캄캄하니 가능하면 잠을 청하는 것이 상책이다. 페루 서남부 사막지대인 나스카에서 쿠스코로 가는 길은 안데스 산맥을 넘는다. 자연 길은 꼬불꼬불 구곡 양장 같은 길일 수밖에 없다. 나스카를 벗어나 서쪽으로 얼마 가지 않아 길은 산길로 접어든다.


남미의 장거리 버스 좌석은 여객기 비즈니스석만큼은 아니라도 만족할 만큼 편안했지만 꼬불꼬불한 커브길을 오르내리는 데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알려진 그 길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지나왔다. 차창 밖이 어렴풋이 밝아왔다. 그리고 아직 어두운 산 능선 위로 붉은 해가 떠올랐다.  머리가 무겁고 숨이 차다고 느꼈다. 생각해보니 적어도 해발 4천 수백 미터는 족히 될 험준한 안데스 산길 655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달렸으니 숨이 차지 않을 수 없다. 버스에 앉아 있으면서도 약간의 어지러움증을 수반한 고산증이 느껴졌다. 어지러움 증세가 사라질 무렵 창 밖으로 수없이 많은 붉은 지붕들이 눈 아래 들어왔다.  


버스 창 밖으로 본 쿠스코 시


고산 증세에 숨찬 잉카의 수도


쿠스코는 생각보다 큰 도시였다. 스페인이 들어오기 전까지 이곳은 잉카제국의 수도였고 지금도 페루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라 하니 그저 작은 고대 역사 속의 작은 도시일 거라는 나의 생각이 버스 속에서 깨져 버렸다.


예약된 호텔은 아르마스 광장 북쪽의 좁은 골목 안에 있었다. 광장 안에는 낮 시간에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어서 호텔의 반대쪽 광장 입구에서 차를 내렸다. 쿠스코의 대성당 앞을 지나 200여 미터를 걸어 골목 입구에서 다시 골목 안길을 100미터 들어가서야 호텔을 찾았다. 대성당 앞길은 평지의 광장을 가로지르는 것이니 그리 힘든 줄 몰랐으나 호텔이 있는 골목길은 완만하게 경사진 비탈길이었다. 그 100미터를 오르는데 몇 번을 쉬었는지 모른다. 아르마스 광장의 해발 높이가 약 3500 미터 정도이니 숨이 찬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안동대학을 비슷한 시기에 퇴직한 친구 교수와 둘이 중국 쓰촨의 동티베트 지역을 여행한 일이 있었다. 그때 다녔던 곳도 해발 약 3500에서 4000미터 정도였다. 밤에 침대에 누워도 숨이 차고 한숨이 계속 나와 둘이 마주 보고 웃었던 일이 생각났다.


호텔 앞에는 작은 라면 집이 있었다. 아침을 못 먹었으니 우선 눈에 뜨인 라면집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한국사람에게 라면 끓이고 김치 담는 것을 배웠다는데 어쨌든 식은 밥 한 공기와 라면 한 그릇으로 아침을 때웠다. 그렇게 맛없는 라면은 생전 처음 맛본 것 같다. 저녁때 여행 떠난 지 27일 만에 한국 음식점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 왼쪽에 보이는 것이 쿠스코 대성당이고 오른쪽은 예수회 교회이다.


사라진 사진 폴더 세 개


쿠스코에 도착한 날은 시내에서만 보냈다. 첫날은 아르마스 광장 주변에 있는 대성당을 비롯한 몇 군데의 성당과 박물관, 그리고 쿠스코의 옛 냄새가 나는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쿠스코를 상징하는 12 각형 성벽석이 있는 대성당의 옆골목을 따라 언덕 위쪽으로 올라가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한 바퀴 돌아 내려오는 길은 특별히 운치가 있다. 아르마스 광장을 둘러싼 다양한 골목길들, 골목 안에 자리한 수도원이나 또 다른 성당들이 스페인 이전 잉카 건축들의 자취를  간직하면서 이 도시의 역사적 층위를 보여준다. 그래서 쿠스코의 골목을 걷는 것은 쿠스코 사람들이 겪은 천년 이상의 시간과 함께 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각별함이 있다.


둘째 날은 쿠스코에서 가까운 지역의 역사유적들이 분포된 '신성한 계곡'이라는 지역을 여행사 투어로 돌아보았다. 신성한 계곡이라고 이름 붙은 지역에는 우루밤바 강을 따라 오얀타이탐보, 삭사이와만, 살리나스 데 마라스, 피삭 옛 마을 등이 포함되어 있고 유적들은 모두 잉카의 문화적 특성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이틀간의 사진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나는 여행 중 그날그날 촬영한 사진을 날짜별로 폴더를 만들어 외장하드에 저장을 하고 그중에서 몇 장을 골라 여행용 블로그로 만든 Dreaming of Moai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렸다. 페이스북에 올리는 일은 가능하면 그날 했지만 피곤해서 그냥 넘기더라도 그 이튿날은 반드시 올리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한국에서 내 소식을 궁금해하는 친구들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따로 일지를 작성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래서 쿠스코에서의 이틀도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사진과 짤막한 글이 올려져 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한 외장하드에는 이 이틀의 폴더 자체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폴더 즉 잉카 트레일의 3박 4일간의 일정 중 마지막 날 폴더도 사라지고 없다. 휴대폰에 담긴 기념사진이 몇 장 있기는 한데 이 글에서 소개할 만하지 못해 유감이다.


이 세 개의 폴더는 끝내 찾을 수 없었는데 아마도 칠레 푼타아레나스와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과 관련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 끔찍한 일에 대해서는 이 연재 글의 두 번째 이야기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연재의 끝 부분에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사라진 사진은 나의 기억까지도 사라지게 했다. 나는 젊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기억력이 매우 나쁜 편이다. 그래서 여행 중 모든 기억은 사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사진이 없어지면 자연 나의 기억도 없어지게 마련이다.  이제 남은 기억은 페이스북에 올려진 몇 장의 사진과 짧은 글뿐이다. 그 사진들을 되살려 아래에 올리고 짧은 캡션으로 설명을 대체하고자 한다. 쿠스코 시내의 사진은 위에 소개한 두 장이 전부다. 아래의 사진들은 신성한 계곡 투어 중에 찍은 사진으로 페이스북에 올린 것을 다시 캡처한 것이다.


오얀타이탐보 마을의 유적이 있는 산 밑 풀밭에 야마가 관광객과 마주 보고 있다.

오얀타이탐보는 읍소재지 정도의 큰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마추픽추로 가는 기차가 출발한다. 마을의 뒷 산으로 오르면 산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깎아 경지를 만든 것이 보이고 맨 위쪽으로 여섯 기둥의 벽이라고 이름 붙은  거대한 돌 벽이 있다. 이 벽은 판석형의 넙적한 돌기둥 여섯 개를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의 틈을 돌을 얇게 쪼개서 빈틈없이 메꾸고 있다. 돌벽의 표면에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것도 보인다. 이는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던 유적으로 보이는데 어마어마한 돌을 옮기고 다듬고 한 기술은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다. 여기서 오얀타이탐보 마을을 내려다 보고 또 맞은편 산을 보면 여기저기 무수한 석조 유적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휴대폰 속에서 겨우 한 장 살아남은 기념사진이 여섯 기둥의 벽의 모습의 일부를 보여준다.  


여섯 기둥의 벽 앞에 선 필자. 이곳에서 촬영된 유일한 사진.


쿠스코 시에 인접해 있는 삭사이와만 유적은 잉카인들의 전통적인 석축 기법을 볼 수 있는 요새지이며 종교적 의식을 위한 장소였다고 알려져 있다. 긴 석축으로 이루어진 석벽의 남쪽으로 넓은 광장이 있는데 이 석벽들은 지그재그 형태로 길게 이어지기도 하고 산의 경사면을 따라 위아래로 계단형을 만들며 상당히 넓은 지역에 퍼져 있다.


유적은 잘 정비되어 있으며 유적의 위쪽으로 지금을 살아가는 잉카의 후손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 유적의 입구 쪽 광장은 기념품을 파는 장터가 되었으나 그곳을 지나면 유적 전체는 잘 정비된 편이었다. 광장의 풀밭에서 볼 수 있는 풀 뜯는 돼지는 오히려 이곳이 오랜 옛날부터 이곳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관광회사의 투어를 신청해서 오면 이 넓은 지역을 한 곳에 서서 그냥 바라보기만 하다가 또 다음 장소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신성한 계곡을 훑어보려면 이 수밖에 없으니 별도리가 없다.


삭사이와만 석벽의 앞으로 현지 주민 한 사람이 걸어온다. 마치 잉카 시대의 어느 시점을 정지시켜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삭사이와만 유적의 돌벽. 잉카인들의 석축 기술은 놀랍도록 정교하다.
삭사이와만 유적의 풀밭에서 줄에 묶인 채 풀을 뜯는 돼지
삭사이와만 유적에서 기념품을 파는 상인이 전통의상을 입고 피리를 불면서 손님을 끈다.


마라스라는 산 계곡 깊숙이 자리 잡은 염전은 바닷가의 염전만 보아온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라오스에 갔을 때 지하수를 끌어올려 도자기 가마 같은 구조를 갖춘 커다란 솥에서 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러나 이곳처럼 산 위에서 졸졸 흐르는 지하수로 이렇게 넓은 산비탈 염전을 만들었다니. 그것은 정말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이 산골짜기에서만 염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소금물이 나오는 곳은 이곳으로 한정돼 있는 것 같다.
산 위에서 내려다본 마라스 염전
물이 담긴 지 오래되지 않아 염전은 마치 모내기 전의 논처럼 보인다.


모라이 지역의 산 위에는 동심원의 형태를 이룬 계단식 경작지들이 있다. 이 경작지들은 지형의 높이에 따라 어떤 곡물이 잘 자라는지 시험하는 일종의 작물재배연구소 같은 성격을 가진다고 하는데 내 눈으로는 그렇게까지 해석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모라이 마을의 동심원 계단식 경작지. 경작지의 높이에 따라 어떤 식물이 잘 자라는지 시험해보는 농장이라고 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내려왔다.


동심원 계단식 경작지 주변의 풍경이다. 땅은 비옥하고 곡식은 풍요롭고 풍경은 아름다웠다.



모라이 마을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차를 판매하는 젊은 여성이 잉카의 전통 의상으로 손님을 맞는다.


잉카 황제 파차쿠티가 1440년 잉카 이전부터 있던 이 풍요로운 경작 지대 피삭 마을을 정복하고 산 능선 위에 건설한 이 마을은 왕실의 은신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성채, 전망대 및 종교적 유적 등이 포함된 이 산 위의 마을은 잉카를 무너뜨린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 1530년대 초에 몰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1570년대가 되어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산 아래 현재의 마을 자리에 새로운 마을이 건설되었다고 한다.


오후의 해가 산 위의 마을 뒤로 기울어져 가는 시간, 산 밑에서 본 마을은 때마침 하늘을 가리며 일어난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실루엣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산으로 오르는 흙길을 걸어 마을에 이르렀을 때 눈앞을 막고 있는 완고한 돌벽들은 거대한 도시 유적에서 보는 잉카의 위대성 같은 것과 달리 무언가 우리와 통할 수 있는 친근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완고한 성채 같은 산 위의 피삭 마을
피삭 유적에서 굽어보는 계단식 경작지와 현대의 피삭마을
피삭 마을에 관광 여행길에 피삭 마을 유적을 찾은 페루의 노인 부부
피삭 근처에서 만난 농사꾼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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