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드디어 볼리비아로 들어간다. 멕시코 칸쿤에서 리마로 들어온 것이 3월 12일이고 오늘이 3월 28일이니 페루에 온 지 17일 째이다. 푸노에서 코파카바나까지는 140킬로미터 정도인데 아침 7시 좀 넘어 출발한 버스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국경선 앞에 내려주었다.
페루 땅의 끝에 세운 문자 조형물
사람들은 국경을 넘기 전에 버스에서 내려 얼마 남지 않은 페루의 잔돈을 몽땅 볼리비아 화폐로 바꾸고 걸어서 국경을 넘는다. 국경을 넘기 직전 도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풀밭에 채색된 영문자로 Peru라고 쓴 문자 조형물이 페루의 끝을 알려주고 있었다.
국경을 넘는 원주민 부부
걸어서 버스길을 따라 국경을 넘으면 바로 길 가에 볼리비아의 출입국 관리소가 있다. 한국인에게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유일하게 입국비자가 필요한 나라이다. 페루의 쿠스코나 푸노에서 비자를 발급받을 수도 있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다고 해서 서울의 볼리비아 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았다.
내가 서울까지 왔다 갔다 할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서울 있는 둘째 딸이 귀찮은 일을 맡아 주었다. 볼리비아 입국에는 지역에 따라 황열병 예방접종을 해야 하지만 라파스와 우유니 등을 거쳐 칠레로 출국하는 사람들에게는 요구하지 않았다.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가장 전통문화가 잘 남아 있는 곳이다. 그 문화는 여인들의 복장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보는 복장은 스페인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다.
이곳의 국경선은 우리에게는 입국 비자가 필요한 엄격한 선이지만 이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원주민들에게는 어느 날 그어진 엉뚱한 선일 수도 있다. 이곳은 스페인이 들어오기 전에는 같은 잉카제국의 땅이었고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는 다른 나라로 분리된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록색 나뭇잎을 배경으로 걸어가는 여인의 붉은색 옷이 인상적이다.
덕분에 별 탈 없이 입국 수속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온 버스를 다시 타고 국경에서 가까운 코파카바나에 도착했다. 나에게 코파카바나는 티티카카 호수에 있는 태양의 섬을 가기 위한 경유지에 불과했다.
태양의 섬으로 출발하는 것은 내일 아침이니 오늘 오후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시내라고 해야 손바닥 만한 도시이니 별로 다닐 곳도 없다. 남미의 어느 도시나 볼 곳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으면 중앙 광장으로 가면 된다.
코파카바나 성모 대성당. 오른쪽의 아치형 문을 사방으로 낸 건물이 골고다를 상징한 세 개의 십자가를 모신 곳이다. 성당 문 옆에 성모상을 조각한 유판기의 동상이 있다.
코파카바나의 검은 성모
중앙광장인 코파카바나 광장의 옆에 하얀 벽체를 가진 대형 성당이 있었다. 갈색의 돌 입자들로 포장된 성당 앞마당도 한낮의 직사광선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이 성당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얀 벽체로 인해 최근에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400년의 역사를 가진 볼리비아를 대표하는 성당이다.
성당의 이름은 코파카바나 성모 대성당(Basilica of Our Lady of Copacabana)이다. 성당은 1668년 계획되고 1678년 건축이 시작되어 완성된 것은 1805년이니 무려 140년이 걸린 셈이다. 성당 안에는 원주민 피부와 형상을 한 성모상이 있다.
예수와 두 도둑을 십자가에 처형한 골고다 언덕을 상징하는 세 십자가
성당을 지은 장소는 본래 잉카의 성지였다. 침략자 스페인은 원주민들이 여기서 모시던 태양신 인티의 신전을 없애고 같은 자리에 자신들이 믿어 온 가톨릭 성당을 지었다.
흰 벽체의 성당 건물과 파란 하늘 그리고 붉은색 마당의 어울림은 성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티티카카의 푸른 물과 함께 지중해의 어느 곳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운 풍경보다는 지구의 반대편에서 온 나에게는 성모에게 쫓겨난 태양신 인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성당 앞에 붙어서 마당 한 편에 자리 잡은 세 개의 십자가를 모신 건물도 인상적이다. 세 개의 십자가는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된 예수와 두 도둑을 매단 십자가를 상징한다.
성당의 경내로 들어오는 문의 모양이 특이하다.
성당 문 옆에 성모상을 조각한 프란시스코 티토 유판기(Francisco Tito Yupangui)의 동상이 있다. 그는 잉카 황제의 후손으로 잉카제국이 몰락한 이후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으로 남미에 들어온 성모상으로 부터 남미 원주민의 모습을 발견하여 조각으로 남겼다고 한다.
이곳 여성들은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위엄을 갖추고 있다.
그가 만든 성모상은 코파카바나의 검은 성모(Virgen Candelaria de Copacabana)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주민 모습을 한 남미 최초의 성모상이라고 한다. 성모상이 완성된 1583년 2월 2일은 마리아 정화의 날이다. 이 날은 지금도 축제일이 되어 있다.
현지 원주민의 모습으로 만든 성상은 멕시코시티의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의 검은 예수상에서 본 바 있지만 성모상은 여기서 처음 보았다. 이러한 원주민의 모습을 한 성모상이나 예수상은 침략자들이 가지고 들어온 가톨릭을 현지화한 것이다.
붉은 치마와 검은 모자의 여성들은 마치 제복을 입은 학생들처럼 구분하기가 어렵다.
이는 남미 원주민들의 민족의식이 외래 종교인 가톨릭에 반영된 것으로 어떻게 보면 원주민들의 독립정신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페인 식민 통치자들이 현지인들에 대한 지배 수단의 하나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클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멕시코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지금 코파카바나 성당의 성모상은 볼리비아의 수호성인이고 이 성당은 볼리비아는 물론 남미의 최고 성지 중 하나가 되었다. 브라질의 유명한 코파카바나 해변도 이곳 성당의 성모상 명칭에서 따온 것이다.
어느 골목이나 그 끝에는 티티카카가 보인다.
골목길의 끝에 보이는 티티카카
푸노처럼 코파카바나도 산의 경사면에 위치한 도시이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모든 길은 티티카카 호수에서 끝이 난다. 골목마다 아래를 보면 호수의 수평선이 보이는 것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중앙 광장에서 내려가는 길들은 대부분 관광기념품을 파는 가게나 또는 잡화점이나 옷가게 같은 것들이 늘어서 있었다. 골목 양쪽의 집들은 대체로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것으로 보이며 길바닥도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어 관광객들을 위해 개보수가 많이 된 듯했다.
골목 안에서 숙제를 하는 아이와 엄마
여기가 볼리비아의 첫째로 꼽을 만한 축제 도시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2월과 8월의 성모 축일에는 남미 전 지역으로부터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호수가 가까워질수록 관광객을 위한 호텔들이 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호숫가로 나가면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해군의 상징인 닻 조형물이다. 볼리비아의 본래 영토는 태평양 연안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전에 언급한 것처럼 19세기 후반의 칠레 페루 볼리비아의 태평양 전쟁에 패하면서 지금의 칠레 북부의 아리카 항을 비롯한 태평양 연안의 영토를 잃어버리고 내륙국가로 되었다.
호수 연안에 있는 해군의 상징 조형물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는 노인
그 후 볼리비아는 칠레와 원수처럼 되어 버렸고 두 나라의 국민 간에도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볼리비아는 언젠가 잃어버린 태평양을 다시 찾는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아직도 해군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 티티카카 호수는 볼리비아 해군의 훈련장이다.
호수는 바다 같았다. 동쪽으로 아득히 수평선이 보이고 그 수평선의 일부를 관광객을 주 고객으로 삼는 유람선들이 가리고 있었다. 한낮의 햇살이 수면 위에서 부서져 수많은 윤슬들이 짙푸른 물결 위에 반짝이고 있었다.
한낮의 햇빛이 반짝이는 윤슬을 만들어 낸 수면 위에 어선과 유람선들이 멋진 그림을 만들고 있다.
한 낮의 햇살이 내려 쪼이는 호수 풍경과 피어 위에서 뛰어 노는 아이가 그림같이 아름답다.
모래밭에서 호수 안쪽으로 선착용 잔교(pier)들이 길게 뻗어 있고 그 끝에 사람들이 앉아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행지에서 이런 풍경을 대하고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새삼 느끼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