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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Mar 11. 2022

잉카의 어머니 티와나쿠 2 -사원의 도시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50

흙의 이미지, 아카파나 피라미드


리마에 도착해서 잉카 문명에 접하면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이 우아카 우아야마르카 피라미드이다. 그때 특별하게 느낀 것이 작은 토산의 경사면을 계단식 피라미드 형으로 깎아 표면을 돌이나 흙벽돌로 쌓았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의 피라미드는 그 후 나스카의 카우아치 유적에서도 보았다. 페루에 오기 전까지 내 머릿속에 있는 잉카의 이미지는 쿠스코의 성벽에서 본 것 같은 돌의 이미지였다.


서남쪽에서 본 아카파나 피라미드


또 멕시코를 돌면서 수없이 만난 피라미드들도 모두 돌로 쌓은 것들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피라미드의 이미지도 모두 돌이었다. 그러나 리마에서부터 만난 잉카의 피라미드는 흙의 이미지였다. 또 표면을 돌을 쌓아 석벽으로 처리했지만 대부분 적갈색의  안산암으로 되어 있어 조금 떨어져 보면 전체가 흙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잉카문명 속에서 흙의 이미지를 만난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동쪽에서 본 아카파나 피라미드


잉카문명을 낳았다는 이곳 티와나쿠에서 나는 또 하나의 피라미드를 만나게 되었다. 티와나쿠의 출입문을 들어서서 유적지를 향해 한참을 걸어가는 동안 눈앞에 작은 동산이 보였다. 가까이 접근해서야 그 동산의 밑부분에 있는 계단식 유구가 보였고 안내판을 통해 그것이 피라미드 유적임을 알게 되었다.


이 피라미드는 다른 지역의 것과 달리 완전한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된 것은 아니다. 동북쪽과 동남쪽 모서리는 안으로 직각으로 잘려 들어갔고  서북쪽과 서남쪽은 안으로 두 번 직각으로 잘려 들어갔다. 동서 중심축을 기준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서북 모서리의 안쪽으로 꺾여 들어간 모습


아카파나 피라미드는 가로 세로 194미터 높이 15.7미터의 위가 잘라진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의 유적이다. 이것은 그 큰 규모로 인해 처음에는 자연적으로 조성된 산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생각했으나 최근 조사에 의해 산으로 보았던 전체 유적이 모두 인공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서쪽으로 난 피라미드로 올라가는 정문 계단(왼쪽)과 동쪽 계단의 구조 일부


피라미드 아랫부분에 드러난 계단은 흙으로 조성한 뒤 측면에 장방형 석재를 쌓아 만들었는데 큰 석재는 65톤이나 나간다고 한다. 따라서 이 피라미드는 흙으로 쌓은 후 사방의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깎아 그 표면에 돌을 쌓아 완성시킨 토석 혼합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피라미드 위에 남은 흙벽돌로 쌓은 이중의 벽을 가진 건축물의 구조물(왼쪽)과 건축 구조물 사이에 있는 안산암 석재

아카파나 피라미드가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피라미드와 외형상으로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평면이 사각형이 아니 모서리가 안쪽으로 계단 모양으로 꺾여 들어간 것이고 다음은 평평한 대지 형태의 윗 면이 넓고 여러 시설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윗 면에서는 희생물로 바친 야마와 추장급으로 보이는 인골이 발견되었고 그와 함께 금과 보석, 도자기 및 기타 공예품 등이 을 발견되었다고 한다.


피라미드 계단석의 축조 형태. 장방형의 붉은색 안산암의 결합이 아름다운 추상화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이 피라미드는  티와나쿠 제국의 제왕이었던 사람의 무덤이었으리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잉카의 피라미드들도 무덤인가? 피라미드 위에서 보고 느낀 것으로는 이것이 무덤이라는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러 평면 대지로 이루어진 넓은 평지에 남아 있는 건물 구조나 여러 돌기둥 등은 이곳에 신전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인골은 아마도 신전과 함께 조성된 지배자의 무덤은 아니었을까?


아카파나 피라미드 상부 평지의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돌기둥들

성벽으로 둘러싸인 칼라사사야 사원


아카파나 피라미드 위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보면 장방형의 돌담으로 둘러 싸인 넓은 사원 유적이 있다. 돌담은 이중으로 되어 있다. 사원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바깥 담이 있고 동쪽 담에 붙어서 내부 공간을 작은 장방형으로 둘러싼 안쪽 담이 있다. 이 안쪽 담으로 싸인 공간이 전체 유적의 핵심으로 보인다. 외부 공간의 동서 길이는 130미터이고 남북 길이는 120미터이다.


아카파나 피라미드에서 내려다본 칼라사사야 사원과 반지하 사원 유적

문은 동쪽으로 나 있으며 문을 들어와서 서쪽을 보면 동서 중심축선 위에 폰세 석상 또는 베네트 석상이라는 이름이 붙은 석인상이 서 있고 그 뒤로 제단으로 보이는 흙으로 쌓은 장방형의 토단이 있다. 폰세나 베네트같은 석상에 붙은 이름은 석상을 처음 발견하고 조사한 고고학자의 이름이다.


이것은 서양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조사한 후 조사자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거나 쉽게 기억하기 위한 목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도 이러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지 않을까?

 

동쪽 문에서 동서로 이은 축선상에 석인상과 토제 제단이 있다. 왼쪽은 서쪽에서 본 것이고 오른쪽은 동쪽 문에서 본 것이다.

동쪽의 문은 이 신전의 정문으로 단순한 문이 아니라 신전 내부로 돌출한 입체적 건축물이다. 출입구 부분은 장방형의 터널 형태로 되어 있다. 문 중심에 서서 신전 내부 공간을 보면 석인상과 토제 제단이 일직선 상에 보이고 신전의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바깥쪽 성벽과 안쪽 담벼락의 사이 공간에도 여러 유적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장방형 성벽의 서북쪽 모서리에 있는 태양의 문과 그 반대쪽인 서남쪽 모서리에 있는 또 하나의 석상이다. 태양의 문과 두 석상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명하려고 한다.


내부에서 본 신전의 동문

칼라사사야 유적에서 특별히 장관인 것은 사방을 돌아가면서 쌓은 성벽이다. 외부에서 유적을 보면 이 강고하게 막혀 있는 성벽만 보인다. 성벽은 붉은색의 크고 작은 안산암을 모자이크 하듯 쌓아 아름다운 미술품처럼 보인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길고 높은 돌기둥을 끼워 넣어서 성벽의 석축이 안전하게 유지되도록 했다. 성벽에서 가장 큰 암석의 무게는 26톤이 넘는다고 한다. 이 벽면과 돌기둥을 반복적으로 짜 맞추는 것은 길고 긴 성벽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고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외부에서 본 신전의 동문


여기서 안산암에 대해 한 가지 말을 덧붙이자면, 안산암의 안산은 안데스산이란 것을 나는 이번 여행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안산암은 영어로 안데사이트(Andesite)로 표기되는데 이 말은 안데스에서 나온 암석이란 뜻이다.


화산 작용으로 생성된 이 암석은 한국에서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을 비롯한 모전석탑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안산암의 색이 벽돌처럼 검붉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내가 모전탑에 관심을 많이 두고 있었으면서도 안산암이 안데스산 암석이란 말에서 나왔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니 얼마나 무지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칼라사사야 성벽 북면의 부분
칼라사사야 성벽의 동북 모서리. 모서리 돌기둥의 크기와 중량감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칼라사사야 성의 동쪽면 일부. 외벽과 그 위로 안쪽 벽면이 보인다.

집 나간 거대 석상, 지하 사원


칼라사사야 사원의 동쪽 문을 나오면 사원의 동서 축선과 같은 축선 상에 지하로 꺼진 장방형의 사원이 있다. 사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는 하지만 이 유적의 성격은 정확히 알 수 없는 듯하다. 500년에서 600년 사이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독특한 유적은 길이 28.5미터 폭 26미터 그리고 지표면에서 지하로 깊이 2.2미터를 파 들어가서 정방형에 가까운 지하 광장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사면 벽은 기둥 모양의 커다란 돌 57개를 돌려세우고 그 사이에 네모난 돌들을 모자이크 짜 맞추듯 쌓아 올렸다. 벽의 밑으로는 배수로를 돌렸다. 광장의 위는 하늘을 향해 열려 있고 바닥에 기둥을 세운 흔적이 없어 따로 지붕을 덮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지하가 아닌 반지하사원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아카파나 피라미드 위에서 내려다본 반지하 사원

유적이 땅을 파 들어가 지하건축물로 되었다는 점 외에도 이 사원의 가장 독특한 특징으로는 벽면에 사람의 머리 조각이 벽 속에서 튀어 나오듯 끼어 있다는 점이다. 벽면의 사람 머리 조각은 모두 175개나 된다. 이중 여섯 개는 복원된 것이라 하며 나머지는 모두 사원 축조 당시의 것이라고 한다.


벽  속의 사람들은 지하 광장을 향해 벽에서  수직으로 튀어 나오듯 얼굴을 들고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이들이 의식을 거행할 때 희생물로 바쳐진 사람의 형상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한편으로는 참담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원의 서쪽 벽면에 사람의 머리 조각이 튀어나와 있고 뒤로 칼라사사야의 동쪽 문이 보인다.

마야에서 잉카로 오면서 끊임없이 만난 인간 희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왜 이들의 신은 이처럼 집요하게 인간의 생명을 요구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기야 신이 요구했겠는가?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겠는가?


광장의 중심에도 세 개의 석상이 있다. 하나는  바르바도 석상(Barbado Monolith)이라 부르는 가장 큰 석상이다. 수염난 석상이라는 뜻이다. 붉은색 사암을 사용하였고 마치 안경을 쓴 듯 두터운 테를 돌린 두 눈과 카이젤 수염 비슷하게 양쪽 볼에 여덟 팔자로 붙은 수염이 있다. 오른쪽 팔은 위쪽으로 올리고 왼쪽 팔은 아래로 내려 엇갈리게 새겼다. 이 석상은 콘티키 석상이라고도 하는데 콘티키는 잉카인들이 섬기는 창조신 비라코차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사원 광장 중심에 세 개의 석상이 있다.

그런데 이 지하 사원의 광장에는 또 다른 석상이 있었다. 높이 7.5미터에 무게가 20톤이나 나가는 이 석상은 티와나쿠 유적 전체의 석상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지금까지 볼리비아를 상징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베네트(Benett) 석상이라고 부르는 이 석상은 지금 유적의 입구의 건너편에 있는 티와나쿠 박물관 안에 있다.


이 석상은 1932년 베네트라는 미국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발굴 후 수도 라파스로 옮겨 갔고 그 후 여러 나라의 박물관을 전전하면서 나라 잃은 신세가 되어 떠돌게 되었다. 또 이름도 없이 고고학자 이름을 제 이름으로 붙이고 다녔다. 이것이 다시 티와나쿠로 돌아온 것은 발굴 후 70년 만인 2002년이었다. 석상으로서는 수난의 70년이었던 셈이다.


높이 7미터의 베네트 석상이 깊이 2.2미터의 반지하 사원 중심에 우뚝 서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반지하 사원이야말로 티와나쿠 유적의 중심 역할을 하지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높이 7미터의 베네트 석상이 깊이 2.2미터의 반지하 사원 중심에 우뚝 서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반지하 사원이야말로 티와나쿠 유적의 중심 역할을 하지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티와나쿠 박물관에 있는 베네트 석상
반지하사원의 바르바도 석상과 다른 두 소형 석상들

그러나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박물관 속에 갇혀 있으니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박물관에서는 사진도 못찍게 하니 많은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발굴 당시의 사진을 보면 베네트 석상과 바르바도 섭상이 나란히 누워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사진으로 보면 그 석상들은 일부러 구덩이를 파고 폐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들은 무슨 이유로 한 구덩이 속에 묻히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 사원이 기능을 상실하게 돈 것과 관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의 침략과 관계 있을까?


바르바도 석상의 얼굴과 하단의 고양이 상

이 어마어마한 석상이 굉장 한복판에 우뚝 서있는 반지하 사원을 상상해보는 것만해도 가슴이 벅차다. 땅속으로 가라앉은 이 사원은 티와나코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였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위에 소개한 바르바도 석상은 실상 베네트 석상의 보조적 존재였던 셈이다. 바르바도 석상의 팔을 보면 제주도 돌하르방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팔 모양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어서 입상으로 조각하는 경우 팔을 처리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르바도 석상의 얼굴과 하단의 고양이 상

석상의 하단에는 고양이처럼 보이는 두 마리의 동물이 마주 보고 있고 양 쪽 측면에는 뱀 같은 동물이 지그재그 모양으로 새겨져 있다. 뒷면에도 인물상처럼 보이는 조각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풍화되어 보이지 않는다. 다른 두 석상은 훨씬 더 코믹한 얼굴 모습을 하고 있는데 키가 작아 마치 아버지를 따라나선 아이들처럼 보인다.


바르바도 석상을 비롯한 이 지하 광장을 지키고 있는 석상들과 박물관에 갇혀 있는 베네트 석상은 아마도 신상들일 것이다. 그것이 잉카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모셔오던 태양신 비라코차 또는 인티인지 아니면 또 다른 신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석상들은 무언가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다가서는 듯한 느낌을 준다.


벽면에 서있는 넙적한 돌기둥. 위의 사람과 비교해보면 이 돌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아래에 벽면에서 튀어나온 얼굴들의 사진 몇 장을 열거한다.


석관의 궁전 푸투니


푸투니(Putuni)라는 말은 아이마라어로 석관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야트막한 외벽은 붉은색의 안산암을 세워 만들었다. 외벽으로 둘러싸인 장방형의 크기는 길이 약 60m 폭 55m이다. 중심부에는 시신을 매장한 석실의 흔적이 있어서 유적의 이름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티와나쿠의 상류층 계급자들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발굴 구덩이가 있어서 보았더니 판석을 이용하여 배수관로를 만든 것이 있었다. 배수관은 다층구조로 보였다. 유적의 한 복판에 이처럼 복잡한 배수관로를 만들었다는 것은 당시의 설계자들이 매우 뛰어난 토목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푸투니 유적의 전경. 외벽은 안산암을 세워 만들었다.
지하에서 확인되는 배수관로의 모습


불타는 돌, 케리칼라


푸투니 유적에 서쪽으로 붙어 있는 케리칼라(Kherikala) 유적은 티와나쿠 유적의 서쪽 끝에 있는 것이다. 케리칼라(Kherikala)라는 말은 아이마라어로 불의 돌 또는 불타는 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이름은 유적 안에 있는 향을 피우는 돌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현장에서 부주의로 인해 찾아보지는 못하였다.


유적은 장방형으로 네 모서리에 키 작은 돌기둥이 있다. 길이 63m, 폭 38m의 안마당으로 구획된 부분이 실제 유적일 것이다.  바닥에는 판석을 깔고 주변의 낮은 벽은 흙벽돌을 사용하였다. 이 유적은 제사를 지낸 신전으로 보기도 하고 티와나쿠의 종교 지도자들이 살던 거주지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케리칼라 유적의 동남쪽 모서리와 서남쪽 모서리의 돌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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