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빌딩이 보여주는 부조화의 도시
컴퓨터로 검색할 때는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에서 칼라마까지 가서 다시 이키케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는 노선 밖에 없었다. 나와 내 생일밥을 함께 한 후 양군이 버스터미널에 함께 가보자고 하여 숙소에 가는 길에 들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칼라마를 경유하기는 하지만 잠시 쉬어서 이키케로 직행하는 버스가 있었다. 짐을 가지고 내리고 타는 번거로움이 사라질 뿐 아니라 대기시간도 매우 짧아서 좋았다.
터미널을 나와 쿠스코부터 라파스와 우유니 그리고 이곳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를 함께 했던 양군과 마지막 이별을 했다. 나는 칠레의 북쪽으로 올라가고 양군은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동안 내가 양군 덕을 많이 보았으니 참으로 고마웠던 여행친구였다.
이키케로 가는 버스 창으로 본 아타카맘 사막의 고원지대. 진흙 웅덩이에 소금이 말라 붙었다. 산 페드로 아타카마의 터미널을 벗어나면서 차창 밖은 모래와 진흙의 끝없는 고원이 계속되었다. 가끔 진흙의 평원이 파 헤져진 곳에 순백색의 소금이 말라붙은 웅덩이들이 보이기도 했다. 안데스의 동쪽과 서쪽은 극과 극에 비유될 정도로 자연환경이 달랐다.
버스는 칼라마까지 1시간을 가고 칼라마에서 사람들을 태우느라 약 30분 쉰 후 다시 이키케를 향해 달렸다. 이키케까지의 전체 거리는 500킬로미터 정도로 대략 6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실제 걸린 시간은 7시간이 더 걸린 듯했다.
낮게 깔려 있는 건물들 위로 무질서하게 서 있는 고층 아파트들이 생뚱맞게 보인다.
아타카마 사막의 모래 언덕이 바다를 향해 내려가는 급경사면으로 버스가 내려가면서 이키케 항구가 비행기에서 보는 것처럼 내려다 보였다. 도시 전체에 2-3층짜리 건물들이 납작하게 엎드린 듯 깔려 있는 위로 어떻게 보아도 어울리지 않는 고층빌딩들이 여기저기 아무런 맥락 없이 솟아 있는 것이 마치 모래밭에 막대기를 꽂아놓은 것처럼 생소했다. 그것은 페루에서 볼리비아를 거쳐 안데스를 넘어 처음 보는 현대식 도시라는 점에서 칠레의 인상을 조금 어긋나게 심어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키케는 남미를 대표하는 자유무역지구의 하나라고 한다. 도시 군데군데에 막대기처럼 꽂혀 있는 고층건물들은 아마도 이도시가 무역의 중심지라는 것을 말해주는 지표적 존재일 것도 같았다.
1885년 말이 끄는 것으로 시작되었다는 이키케 시내의 트램
5천 년 역사의 방향을 튼 초석 광산
이런 도시에서 트램을 볼 수 있는 것도 매우 이색적이었다. 트램은 시민들의 발을 대행한다기보다는 대부분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이 주요 소임인 듯했다. 트램의 역사는 이미 1885년부터 시작돠었다고 한다. 1883년 태평양전쟁이 끝나면서 이키케는 칠레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그 후 초석의 활발한 채굴과 함께 칠산염 산업이 발달하면서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한 성장의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이 도시 트램이다.
처음 트램은 말이 끄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뒤에 영국인이 회사를 넘겨받은 후 가솔린을 동력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키케의 도시 트램은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볼리비아의 관할에 있던 이키케가 칠레로 넘어가고 초석이라는 당시 세계적으로 주목받던 광물 산업을 바탕으로 한 칠레 근대사가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바닷가에서 본 이키케 시 이키케 앞 바다는 파도가 좋아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이키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역사는 대체로 5000년 전까지 올라간다. 아타카마의 선사시대 친초로 문화가 이곳에서 발상했다고 하니 보잘것없는 사막의 해안 모래언덕의 도시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층위는 상당히 쌓여 있는 셈이다. 이키케라는 말의 뜻은 아이마라 어로 꿈 또는 휴식을 뜻한다고 한다. 아이마라 족은 안데스의 고원에 사는 유목민들이다.
그들의 일부는 오랫동안 산소 희박한 고원에서 떠돌면서 유목을 해오다가 이곳 바닷가의 저지대를 보고 사는 방법을 바꾸었던 것 같다. 이곳의 지명이 꿈 또는 휴식을 뜻하는 것은 그러한 아이마라 족의 희망이 반영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바다를 근거로 고기를 잡거나 또 약간의 오아시스 지역을 이용해서 농사를 짓는 이키케 지역의 사람들은 정치적인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아이마라 족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도시가 끝나는 곳에는 사막의 모래산이 무대 배경처럼 막고 서 있다.
이키케는 1830년대부터 초석 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질산염 무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인들이 몰려들었다. 이 지방의 초석은 질산칼륨으로 이루어진 일반 초석과 달리 질산나트륨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료나 화약 또는 도자기에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칠레 초석은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었고 이키케는 19세기부터 무역과 산업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키케가 남미의 대표적인 자유무역항구로 이름이 나 있는 것은 이미 백수십 년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시가지는 현대식 도시로 바둑판처럼 잘 짜여 있는데 도로의 동쪽 끝은 어디나 모래 언덕이 병풍처럼 막아서 있다. 이 모래산들이 안데스 고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고 바다의 물결도 잠재워 이키케를 평온하고 안전한 항구로 만들어 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칠레 근대사를 보여주는 아르투로 프라트 광장
남미의 여느 도시처럼 이키케에도 중앙광장이 있다. 광장의 이름은 아르투로 프라트 광장이다. 아르투로 프라트(Arturo Prat)는 1879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키케 전투에서 전사한 해군 장교로 칠레 사람들이 영웅으로 받들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일만 페소짜리 화폐에도 올라 있는 것은 물론 해군사관학교의 이름에도 들어가 있다. 광장의 옆에 있는 대학의 이름도 아르투로 프라트 대학이다. 칠레의 각 도시에 있는 광장 이름에 아르투로 프라트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 많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르투로 프라트 광장의 시계탑
도시의 중심인 중앙광장에서 맡을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다른 도시에서처럼 전통적 유럽의 냄새가 아닌 미국의 어느 소도시 냄새가 났다. 중앙광장의 한 복판에는 하얗게 빛나는 시계탑이 하늘 높이 서 있다. 이렇게 시계탑이 주인으로 서 있는 광장도 이전에 본 기억이 없다. 대개 광장의 중심에는 독립영웅의 동상이 있거나 예술적 조형물인 분수가 물을 내뿜는다. 주변에는 시간의 켜가 쌓여 무게감이 돋보이는 대성당이나 관청의 청사가 있다. 그런데 이키케의 중앙광장의 시계탑은 지금까지 다른 광장에서 보았던 중후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딕과 이슬람 건축 양식이 조화된 시계탑
고딕 성당의 종탑 같은 느낌을 주는데 아래층의 사방으로 낸 아치형 문은 이슬람 건축에서 가져온 듯하다. 그러나 중세 고딕이나 이슬람 건축에서 느낄 수 있는 장중함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밝은 백색의 목조 건물 때문으로 보였다. 시계탑은 1878년에 건축되었으며 가동된 것은 1879년 1월이라고 한다. 건축 자재는 미국 서해안의 오레곤에서 가져온 소나무라고 한다.
오레곤 소나무가 이 먼 아타카마 사막의 서쪽 태평양 연안까지 오게 된 것은 초석을 싣고 미국으로 간 화물선에 그곳의 좋은 건축재 소나무를 싣고 왔기 때문이다. 또 시계는 영국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하니 이 시계탑은 당시 세계로 수출되던 이 지역의 초석 무역의 결과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시계탑이 세워지고 가동된 것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 된 것이며 당시 이키케는 페루의 영토였다. 즉 지금 칠레의 북방 주요 항구의 상징적 건축물이지만 처음 이 시계탑은 페루의 것이었다.
공사중인 시립극장 정면. 지금은 관광객들에게는 개방되어 있지만 극장의 기본 기능인 공연은 하지 않는다.
볼만한 건물로는 광장 남쪽에 시립극장을 들 수 있다. 1890년 1월 1일 개관한 것으로 칠레의 근대건축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라고 한다. 현재 이 극장은 공연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관광객들에게 개방하여 극장의 구조 등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내가 갔을 때는 공사 중이어서 그나마도 볼 수 없었다.
극장 건물은 대부분의 이름난 건축물이 석조 건물인 것과 달리 목조로 된 건물이다. 나무는 시계탑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오레곤에서 가져온 소나무라고 하는데 역시 이키케에서 초석을 실어 나른 화물선을 이용하여 이키케로 가져왔다고 한다. 이 건물도 시계탑처럼 아타카마의 초석 무역의 산물인 셈이다.
구두 한 짝이 보여준 노동자의 삶
이키케의 역사를 보여주는 곳으로는 아무래도 이키케 지역사 박물관을 들어야 할 것이다. 박물관에는 선사시대 친초로 문화를 보여주는 유물부터 사막에서 출토된 미라와 복식자료를 비롯하여 신석기 이후의 곡물 자료 등이 석기 등 농기구들과 함께 잘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사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전시물 중 가장 내게 흥미롭게 보였던 것은 어느 노동자가 신고 일했던 구두 한 짝이었다.
이키케 지역사 박물관 정문
이키케는 근대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린 곳이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페루와 볼리비아 간의 전쟁을 감당해야 했고 한때 볼리비아의 관할 하에 들어가기도 했다. 초석이 발견된 후 초석 산업이 크게 일어난 19세기 중반에는 페루의 가장 중요한 산업도시로 떠오르기도 했지만 1879년 일어난 태평양 전쟁으로 페루 볼리비아 칠레 세 나라의 전쟁터로 되면서 또 많은 시민들이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주 산업인 초석 산업은 경제적으로 지역을 발전시켰고 칠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에 산업은 더 크게 성장되었다.
초석 노동자의 고달픈 삶을 대변해주는 구두와 술병들
새로운 산업의 성장은 노동자의 희생을 초래하게 되었고 이런 사회적 배경이 이키케를 칠레 노동운동의 중심지로 만들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종내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내전 상태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서 발생한 것이 1907년의 산타마리아 학교의 학살이다.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시내의 산타마리아 학교에 모인 수천 명의 노동자에게 발포하여 대략 2천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결과 이키케는 칠레의 노동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1912년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탄생되게 되었다. 이 정당은 뒤에 공산당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박물관 진열장의 구두와 술병들은 당시 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악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는가를 직설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그러면서도 노동자들은 야구 등 스포츠를 즐기면서 힘든 몸과 정신을 풀고 있었음을 야구 글러브가 보여주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스트레스를 풀어 주었을 야구 글러브
바닷가에서 시가지로 들어오면서 갑자기 빨간색으로 칠한 단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 건물은 시내에서 별로 볼 수 없는 빨간색 벽면에 태권도를 하는 그림이 그려 있었고 한글로 태권도라는 글씨가 선명히 쓰여 있었다. 태권도가 세계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곳에까지 들어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반가운 마음이 셔터를 누르게 했다.
시가지 변두리에서 만난 태권도장. 한글로 쓴 태권도라는 표기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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