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와 퇴화
걱정 보따리
주택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아파트로 살림을 옮겨야 하는 어무니는 요즘 걱정이 한가득이다.
뭘 버려야 하냐
이 쓰레기들은 어쩌면 좋겠냐
이게 그 집에 다 들어가겠느냐
저건 꼭 가져가야 하는데... 저게 들어갈까?
질문은 끝이 없고, 정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어무니의 주택 살림은 장아찌 용기도 큼직하고, 포대자루에 든 천일염도 있으며, 김치 버무릴 때 쓰는 고무대야도 여러 개다. 게다가 상추, 고추를 심던 투박한 화분도 쉽사리 잘라내지 못한다.
무엇을 선별할지가 우선 과제인 어무니는 붙박이장을 열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짐더미에 “아휴, 왜 이런 걸 두고 살았지…”라는 말을 탄식처럼 흘리곤 했는데 그 안에는 놀람도 섞여 있었다.
쓸 것 같아서
붙박이장의 한편이 비어질 때마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쓸 것 같아서, 버리기 아까워서 넣어두고 그 위에 쌓아두고 묶어서 꿍쳐두고만 있었던 것들을 향해 어무니는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하셨다.
"에휴 다 욕심이지. 넣어두면 쓸 줄 알았지. 이것도 다 돈인데 이제 다 버려야 하네"
어무니는 '자부동'이라고 부르는 '방석'을 한가득 종량제봉투에 꾸겨넣으면서
"여기 더 넣어 이쪽도 공간이 비었잖아 이렇게 눌러 여기로 당겨서 묶어"
퇴화
그렇게 내 다리에 체중을 실어서 꾹꾹 눌러 담은 어무니의 아껴뒀던 짐더미는 아까운 종량제봉투에 포장되어 쓰레기로 퇴화되었다.
"아부지 이거 저기로 갖다두셔요"
"네가 하지 왜 아빠를 시켜~ 아빠가 힘이 없어. 네가 해~"
내가 아는 아부지는 기운 센 천하장사였다. 그런데 이제는 기력마저도 매일 퇴화되시는 중이다. 걸음걸이가 흔들리고 불안정해지는 것 역시 치매라는 병의 작동방식이라고 한다.
그래도 나의 아부지는 종량제 봉투를 번쩍 들지는 못했지만, 질질 끌어서라도 소싯적 천하장사임을 증명해 보이셨다.
진화
작은방 붙박이장 하나가 이 정도의 짐더미이니 몇 번은 더 종량제봉투와 사투를 벌여야 한다. 다음엔 내가 기운이 센 자식으로 진화해야한다.
남은 한 달, 이사 준비는 이렇게까지 묵혀두고 살았다는 욕심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될 것 같다.
35년 만에, 어무니가 처음으로 덜어내는 시간을 보내게 될 듯하다.... 그러나 과연 비워질까?
어무니는 버려질 커피잔을 일일이 닦았고, 일회용 용기들을 아쉬워하며 쇼핑백에라도 꾸겨넣었으며,
다 구겨진 양은냄비의 회생법을 알고 싶어 하신다.
여전히 진화할 줄 모르는 어무니의 살림살이를 보며 나는 노년의 웃픈 현실을 마주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