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때리는 시간이 늘어가고 있다. 버스를 타고 차창 밖 사람들과 건물들을 보는 것이 재미있고, 공원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다. 아버지가 계신 시골에 가서 앞마당에 펼쳐진 논밭을 바라보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심지어 한 평도 안 되는 우리 집 베란다에서 옆집 담벼락과 손바닥만 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는 것 마저 좋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그만하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은 그저 멍하니 눈앞에 있는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 입과 귀가 쉬고 싶다는 신호를 내게 보내고 있는 것인데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30대에 비해 40대인 나의 인간관계는 매우 극소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도 다 채워지지 않는다. 그마저도 자주 만난다거나 전화통화를 종종 한다거나 문자를 가끔 주고받는 것도 아니다. 얼마나 자주 연락하느냐가 친밀도의 기준이라기보다는 이 사람이라면 몇 년 만에 불쑥 연락을 해도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에겐 친한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길에서 마주친 지인이 그동안 왜 그렇게 연락이 없었냐고 내게 면박을 줄 때면 솔직히 말문이 막힌다. 연락을 할 이유가 없으니 또는 이유 없이 연락하기 싫으니 그런 것이 아닌가. 연락을 안 한 것은 피차 마찬가지인데 서로 같은 이유로 연락을 하지 않았을 테니 그것으로 나에게 서운함을 표현하는 것은 더더욱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오랜만에 만나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큰 의미 없이 툭 던진 말일 수도 있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그 사람을 손절한다. 이러다 보니 내 주위에 사람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가고 있다. 조만간 가족만이 나의 유일한 관계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느 순간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관계들이 나를 피곤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의 청년시절에는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인맥을 쌓는 것이 나의 소중한 재산이 되는 것처럼 좋아 보였다.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들에게 할애해야 하는 나의 시간과 노력도 그만큼 많아져야 했다. 그러나 그런 시간들이 지나고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여러 번의 상처와 한 가지 깨달음뿐이다. 믿었던 친구들에게 상처를 받았던 일도 많았지만 그들에게 쏟아부었던 시간의 일정 부분을 나 자신에게 투자했다면 더 좋았겠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몇 시간씩 나와는 상관없는 세상사의 이야기를 하하 호호 웃으며 그들과 떠드는 시간에 화초라도 하나 키우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다면 살아있는 생명을 돌보고 누군가에게 음식을 대접했다는 보람이라도 얻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친구들의 이름도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최근에 푹 빠져서 보는 유튜브 영상이 있다. TV PD로 일하고 있는 20대 젊은 여성이 시골로 내려가 낡은 폐가를 구입해 집을 고쳐가며 살아가는 귀촌 이야기이다. 그녀는 왜 시골로 갔을까? 인적이 드문 환경에서 느리고 불편한 생활을 기꺼이 찾아 하는 이유는 뭘까? 내가 느끼는 그 이유일까?
사회생활을 하며 맺게 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의 반 타의 반 얻게 된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탈진은 나의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인간관계를 대폭 좁히고 조용한 곳에서 멍 때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생각을 멈추고 자연 그대로를 입과 귀가 아닌 눈과 코로 느끼는 것.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내 삶을 성찰하게 된다. 대 자연 앞에 나는 한없이 겸손해지면서. 이젠 100명의 친구가 부럽지 않다. 누가 마지막 1인으로 내 옆에 남게 될지 모르지만 그 한 명의 친구와 나 자신을 위해 하루 24시간을 보내고 싶다.
정말 친구 한 명만 남는 건 아니겠지?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