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조오억 개의 감정들을 느끼며 숱한 밤들을 보냈을 텐데

by 신이나

어릴 때 난 책을 좋아했다. 책 말고는 할 것이 없기도 했지만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지금처럼 게임기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재미없었다. 내성적인 성격에 빼빼 마른 몸은 활동적인 친구들의 지치지 않는 에너지가 부담스러웠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삼성당 출판사의 세계 위인전 60권이 책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집은 부유하지 않은 가정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야 하는 나와 동생들에게 부모님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선물이었다. 처음 그 책들을 보자마자 네 번째 책인 《헬렌 켈러》를 읽고 싶었다. 그러나 난 첫 번째 책인 《링컨》부터 읽어야 했다. 그래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순서대로 읽어야 마음이 편했던 특별한 나였다. 읽는 속도가 빠른 편도 아니었다. 한 글자씩 한 땀 한 땀 읽어야 내용이 이해되었다. 덕분에 링컨의 어린 시절만 일주일이 걸렸다. 나의 네 번째 책인 《헬렌 켈러》를 읽은 건 3개월이 지나서였다.


최대치의 경제적 선물을 하신 엄마에게 몇 달 동안 모질게 조르고 졸라 세계명작소설집을 얻어냈다. 역시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투박한 흑백 그림이 가뭄에 콩 나듯 나왔던 위인전과는 달리 화려한 그림이 풍부한 블링블링한 소설집은 내게 보석과도 같았다.


《제인 에어》를 집어 들었다. 저녁에 읽기 시작한 책은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이틀 만에 그것도 단숨에 읽은 첫 번째 책이었다.


책 읽는 동안 난 ‘제인’이었다. 그녀가 부모님을 잃고 친척집으로 보내질 때 나도 함께 따라나섰다. 친척으로부터 학대와 폭력을 당할 때 난 분노했고 제인과 함께 피를 흘리며 주먹을 쥐었다. ‘천벌을 받아라! 이것들아!’ 로우드 학교로 보내지고 친구 헬렌을 만났을 때 제인과 나는 동굴에서 빛을 발견하는 느낌이었다. ‘그래, 진정한 친구는 한 명이면 충분해.’ 그러나 평탄할 리 없는 제인의 삶은 헬렌을 떠나보내야 했다. 헬렌이 죽고 학교를 떠나 손필드에서 가정교사로 들어갔을 때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부디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세요. 그동안 힘들 만큼 힘들었잖아요!’


대저택엔 그가 있었다. 로체스터. ‘하느님, 당신을 사랑해요!’


제인과 로체스터 씨 사이에 사랑이 싹틀 때 나도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제인과 함께 좌절했고 그를 잊기 위해 나도 애를 써야 했다. 리버스가의 존이 제인에게 청혼했을 때 난 제인에게 외쳤다. ‘안 돼! 로체스터 씨가 있어! 난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의 외침이 들린 것인지 제인은 로체스터 씨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듣고 그에게 달려갔다. 전 부인의 방화사건으로 한 손과 두 눈의 시력을 잃은 로체스터 씨. 그를 만났을 때 난 제인과 함께 펑펑 울었다. 그리고 행복했다. 제인이 로체스터 씨와 결혼하고 그의 한쪽 눈이 보이기 시작할 때 난 안도하며 힘들게 책을 덮었다.


롤러코스터 같은 한 여자의 삶이었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제인과 로체스터 씨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삶을 처음부터 되짚어 보며 머릿속으로는 순간순간의 상황들을 재생했다. 감정의 긴 여운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중학생의 감성은 그랬다.


최근 다시 그 책을 읽었다. 중학생의 감성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감정의 여운은 개뿔. 마지막 장을 1초의 주저함 없이 바로 덮었으니까. 메마른 40대 중년의 감성은 이런 것 인가? 어려운 가정환경을 견디며 계급의 차이를 뛰어넘어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제인의 용기가 대단해 보일뿐. 사랑 따위는 믿지 않는 세파에 찌든 차디찬 중년 여성인 나는 그랬다.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는 어린 시절이라면, 책을 펼치는 순간 주인공으로 빙의되어 울며 웃으며 방바닥을 뒹굴 거렸을 것이다. 지금은 느낄 수 없는 오조 오억 개의 감정들을 느끼며 숱한 밤들을 보냈을 텐데. 순수한 소녀의 감성으로 더 많은 고전들을 읽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쉬움도 달랠 겸 40대 중년에 딱 어울리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봐야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시골집 구출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