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에게

by 신이나

입은 있으나 할 말이 없다는 상황이 또 나와 버렸어요. 우연히 퀴즈 프로그램을 보다 당신들과 관련된 문제가 나왔죠. 저는 여전히 입가에서만 맴돌 뿐 정답을 맞히지 못했어요. 물론 입가에서 맴돌던 답도 정답과는 거리가 멀었고요. 당신들의 세계를 알아가기 위해 몇 번 시도를 해보긴 했지만 여전히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이런 나 자신을 생각하니 갑자기 화가 나 벌떡 일어났어요.


방에서 잠자고 있던 큰아들에게 무작정 찾아가 다짜고짜 질문했어요.


“도대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알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되는 거니?”


침대로 돌진해 앞뒤 없이 질문을 해대는 엄마를 보고 아들은 당황했어요. 놀란 눈으로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잠을 청하더라고요.


“바다의 신이 누구야?”

“……포세이돈”

“포세이돈의 아들은?”

“……폴리페모스”


기가 막혔죠. 나는 그냥 바다의 신이 있겠거니 생각해서 물어봤는데 이 녀석은 바로 대답했어요. 신들은 가족관계가 워낙 복잡해서 아들 하나는 있겠거니 생각해서 물어봤는데. 와, 그걸 또 대답하는 거예요. 사실 아들이 대답한 답이 정답인지도 잘 몰랐던 상황이니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자괴감이란. 당신들은 이런 제 마음을 이해할 수 있나요?


“그걸 어떻게 다 외울 수 있어?”

“책을 계속 읽어.”


이렇게 무책임한 대답을 하다니. 대학교 수석입학자에게 ‘공부는 어떻게 했나요?’라는 질문에 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판에 박힌 심지어 전 국민이 다 외울 수 있는 ‘교과서 열심히 봤어요.’라는 답과 뭐가 다른가요?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외울 수 있는지 진심을 담아서 얘기해 줘야지.”

“어떤 책이든 그냥 읽어.”


무례한 놈. 엄마가 오래간만에 절실히 도와달라고 하는데 저렇게 심드렁하게 눈을 감고 대충 얘기하다니. 순간 저는 저 녀석의 태도에 분노가 일었습니다. 멘토의 어원을 공부하다 알게 된 오디세우스 아들을 질문해서 저 놈의 무릎을 내 앞에서 처참히 꿇게 만들고 싶어 졌어요.


“오디세우스 아들이 누구야?”

“……텔레마코스”


이런! 단번에 맞혀버리다니!


“텔레마코스 엄마는?”

“……페넬로페”

“훗, 그건 할리우드 배우 이름이야.”

“……”

“뭐야. 모르는 거야?”

“……오디세우스 부인 맞아.”


힘없이 대답하는 아들을 보고 한 건 잡았다 싶어 아들 방을 나와 핸드폰으로 바로 검색해 봤죠. 그래요, 아들은 힘이 없던 것이 아니라 기가 찼던 모양이에요. 그 할리우드 여배우가 오디세우스 부인 맞아요. 무릎을 꿇게 하고 싶었지만 제가 저 녀석 앞에 무릎을 꿇은 셈이었어요. 처참히. 분노가 다시 자괴감으로 변했죠.


당신들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몇 해 전 그리스 로마 신화 책을 손수 구입해서 읽었어요. 초반에 나오는 몇 명의 신들과 가족관계는 이해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신들의 이름이 점점 길어지면서 발음도 힘들고 가족관계는 광활한 평야만큼이나 넓어졌어요. 아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부인도 점점 많아지면서 저의 뇌는 과부하에 걸려버렸죠. 혹시나 그림과 같이 보면 괜찮을까 싶어 아들이 초등학교 때 읽었던 20권짜리 만화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그림도 컬러풀하고 설명도 길지 않아 좋았지만 등장인물이 많아지면서 그 파란 머리 남자가 이 푸르스름한 머리 남자 같았고, 그 노란 머리 여자가 이 누르스름한 머리 여자 같으면서 앞에 나왔던 신들을 모조리 잊어버리는 악순환에 빠지고 말았어요. 그렇게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나.’ 판단하고 깔끔하게 당신들을 놓아주었죠.


그런데 왜! TV 퀴즈 프로그램에선 당신들과 관련된 문제들이 자꾸 나오는 거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간간이 나오는 걸 보면 당신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문제를 맞히고 싶은 열망에 오만가지 답을 해보지만 당신들의 이름을 말하기보다는 명품 이름을 뱉어낸 적이 더 많았어요. 솔직히 당신들의 문제를 거뜬히 맞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워요. 멋져 보이기도 하고요. 문제를 들을 때마다 답은커녕 문제 자체를 이해 못하는 나 자신이 이렇게 미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올해는 당신들의 세계를 정복하기로. 무례하고 재수 없는 아들의 조언대로 지칠 때까지 읽어보려고요. 왜 그렇게 당신들만 안 외워지는지 알 수 없지만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다시 한번 해볼게요. 어느 순간 퀴즈문제를 미소 지으며 쉬크하게 대답할 수 있는 그날까지. 그때까지 당신들도 기다려 주세요.


“엄마,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모스를 장님 만들어서 포세이돈 분노로 10년 동안 고향으로 못 돌아간 거 알고 있어?”

“……”


‘그래, 너 잘났다. 너 잘났어. 기다려. 곧 복수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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