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투지>, "E"
"어제 같이 봤던 <웬즈데이> 있잖아!"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J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세상에 거기 나온 교장 선생님 역할 배우가 그웬돌린 크리스티였던거야. 어쩐지 키가 크더라니. <왕좌의 게임>에도 나온 배우거든. 진짜 메이크업 바꾸니까 못알아 보겠더라"
그 말을 듣는 E의 표정은 어색해보였다. 그녀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J는 자신과 E가 애초에 서로 가까워질 수 없는, 무형의 벽을 사이에 둔 관계라는 사실을 그때 그웬돌린 크리스티 얘기를 하다가 깨달았던 것 같다. E는 그다지 J의 말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왕좌의 게임>에서 무슨 배역이었냐'라거나 하다못해 '<왕좌의 게임>이 뭐냐'라는 질문조차 나오지 않았다. J는 수 개월이 지나면서 점점 언젠간 나도 관심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기 시작했다.
역설적으로 그 희망의 끝에 새해가 시작되었다.
스스로가 못나서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한동안 J는 괴로웠지만 그 괴로움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새해의 첫 달이 끝나가던 어느날, 시골의 텅 빈 겨울논을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문득 E의 생각이 났다. 처음 사귀던 때는 벼가 푸릇푸릇하던 여름이었다. 서로를 조금 더 알게됐다고 생각했을 땐 벼가 노랗게 익어 고개를 숙였던 가을이었다. 그리고 남은 낭만을 바닥까지 긁어 없앤 겨울엔 논은 황량한 바닥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어.' J는 생각했다. 반 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보내고도 그는 아직도 E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나무와 식물을 좋아하고 푸릇한 벼를 보면서 웃을 줄 알던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이리도 차가울 수 있었을까. 시골길에 난 왕복 2차선 도로는 몹시 좁았고 코 앞에 차는 거북이처럼 앞 길을 막고 있었다. J는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