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
* 2014년 여름에 작성된 초고이다. 이후 두어번의 퍼블리시 기회가 있었으나 이후 글의 완성과 탈고가 안된 채 방치되어 있던걸 극히 일부 수정하여 올립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세 계절이 흘러갔다. 세 계절이 흐르는 동안 딸 잃은 아비는 이 나라의 큰 도시,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한 여름의 땡볕 아래 앉아 50일에 이르는 목숨을 건 단식으로 딸 잃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과 설을 보냈지만 유가족은 웃을 수 없었다. 여전히 열 명의 주검은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깊은 진도의 심해에 잠들어 있었다. 계절이 흐르는데도 사건의 수습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가족을 잃은 유가족과 피해자들은 이 어처구니없고 황망한 죽음 앞에 슬퍼하면서도 진실과 책임을 묻는 고독한 싸움을 진행했다.
하지만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집권세력과 집권여당은 이 사안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 부정하고 있으며, 책임을 묻는 요구를 철저히 파당적, 인격적 공격으로 이해하고 있다. 참사의 수습과 후속대책에 있어 유가족들과 함께 호흡하며 때로는 조율을 때로는 대변의 역할을 해야 할 야당은 온전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섣부른 타협 시도로 전도유망하던 야당의 수장은 정치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야당의 기능 상실로 집권 보수당이 논의의 주도권을 행사했다. 보수 일변도의 언론 환경에서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균열점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사고’로 폄훼되고, 어느 종교 집단의 탐욕이 낳은 비극으로 치부되고,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고통과 이에 대한 책임 요구는 이기심이라고 공격받았다. 근래 새롭게 대두된 한국의 넷우익들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들에 대해 사회 통념과 도덕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비난과 막말을 쏟아냈으며, 자식 잃은 아비의 단식에 폭식 투쟁이라는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가질 정도의 모욕으로 응답했다. 결국 통과된 특별법이란 것은 사실상 탈진해버린 유가족의 의사는 충분히 토론되고 반영되지 못한 법이었다. 물론 유가족과 시민사회의 요구에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특별법 제정의 대원칙으로 당사자의 목소리는 집권세력과 보수언론의 프로파간다에 묻혀버렸다. 힘겨운 유가족과 시민들의 요구와 투쟁에도 불구하고 관철되지 못한 특별법과 특별법을 근거로 만들어진 조사위원회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지나며 사실상 기능 마비 상태에 놓여 있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사건 자체를 통해 그 안팎에 존재하는 한국 사회의 모순들이 드러나는 하나의 총체적 균열이며 성찰적 계기다. 그 가운데서도 핵심은 바로 국가의 책임 문제다. 어떠한 경위와 배경으로 그런 문제 있는 배가 운항을 할 수 있었는지, 배가 여러 결함과 문제를 떠안고 출항하는 것을 왜 국가가 막지 못했는지부터 왜 피해자들이 구조되지 못한 채 가족과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죽어가야 했는지, 사고의 구조와 수습 과정에서 보인 미심쩍은 부분들과 국가의 역할 부재 전반이 바로 국가 책임의 영역이다. 이는 지난 10년의 민주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거치며 드러난 신자유주의와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이며, 무능한 정부 조직과 관료 조직의 문제이며 또한 유가족과 국민들에게 정확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는 국가의 정직성, 공적 신뢰의 문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근대 이후 국가의 역할로 자명하게 수용된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국가’라는 공리의 문제다. 결국 세월호 참사에는 선주와 운영사, 선원, 배의 출항과 운영 감독 책임자, 구조 책임자 등이 져야할 ‘좌’만큼이나 국가가 져야할 ‘책임’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국가는 스스로 책임지려 하지 않고 있다.
결국 세월호 참사는 그 사건 자체가 드러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모순과 현실의 단면을 통해 우리에게 강력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1997년 외환위기와 이어진 신자유주의 개혁 이후 취약해진 국가의 역할, 공공성, 책임 전반의 문제, 타자의 고통과 호소에 대한 응답 가능성의 문제를 통해 반추할 수 있는 개인의 윤리성과 공감,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희석하고 왜곡하는 일련의 시도들이 세월호 참사에 존재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성찰적 계기가 한국 사회에 생명력을 지니고 유의미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낙관적인 답을 하긴 힘들어 보인다. 지난 2013년 여름, 김영오씨의 긴 단식 투쟁과 이어진 원내에서의 정치적 교섭의 결과, 여러 곡절을 거쳐 통과된 세월호 특별법은 진상 조사위원회의 구성과 위원의 선임은 물론 정부와 여당 측 조사위원들이 보인 파행적 행동으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진상 규명에 있어 가장 핵심적 요소로 기억과 성찰, 조사 전반에 강력한 시각적, 상징적 계기가 될 수 있는 세월호 선체의 인양은 경제적 논리로 유예되고 있다.
특별법과 조사위원회의 무력화, 선체인양의 지연, 넷우익과 보수 언론의 선전으로 세월호 참사의 사회적 의미 역시 자리 잡지 못하고 퇴색되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세월호 참사의 마무리는 국가의 ‘책임 없음’ 선언과 금전적 보상(배상이 아니다)이 될 공산이 크다. 한국 사회는 이와 같은 국가적 책임, 구조적 책임이 외면 부정되고, 개인의 소통, 공감 불가능이 드러난 가까운 사례를 기억하고 있다. 1990년대 냉전의 종식 이후 열린 ‘증언의 시대’와 1990년대 증언의 시대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처가 바로 그것이다. 김학순 여사는 최초로 이 문제를 증언함에 있어 일본 정부 차원의 책임 인정을 요구했고, 송신도 여사는 총리의 공식적 사죄를 요구하는 소를 제소하기도 했으나 이 증언의 시대는 일본 사회에 성찰을 기반으로 한 진보를 낳기보다 이른바 역사수정주의로 불리는 우익의 반동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증언의 시대가 시작된 이래 고노 담화, 호소카와 연설, 무라야마 담화로 이어지는 발언에서 부분적 사죄와 강제성의 잠정적 인정을 했으나 이것이 국가 수준의 전면적인 책임 인정의미 하지 않았으며, 자연히 국가에 의한 배상이 아닌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통한 경제적 급부의 지급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양자 사이에는 국가의 책임, 구조적 책임, 성찰의 기회의 마멸이라는 많은 유비점이 존재한다. 이에 이 글은 세월호 참사의 가장 우려되는 미래상으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여성평화기금)’을 상정하고, 여성평화기금을 만든 1990년대 일본의 경과와 그 과정에 나타난 책임 희석의 논리를 살피고자 한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국가 책임 논쟁은 1991년 고 감힉순 할머님의 종군 위안부 강제동원 증언을 전후하여 표면에 떠오른 일본의 전쟁, 식민지 지배 책임 문제와 그 논의와 유사하다. 1989년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 육군 강경파에 의해 주도된 침략전쟁의 역사 한 가운데 섰으며, 1945년의 무조건 항복을 외친 당사자, 일왕 히로히토(쇼와 천황)이 세상을 떠난다. 비록 동경 극동군사재판에 기소되지 않으며 직접저인 전쟁 책임을 회피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히로히토가 침략과 식민지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를 의식한 듯, 당시 총리 다케시타 노보루의 근화(謹話)에는 히로히토의 침략 책임을 감싸고 변명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다케시타 노보루는 근화에서 히로히토가 비록 선전 교서와 종전 교서의 최종 결정권자지만 그 전쟁과 침략이 히로히토의 본의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즉 전쟁은 히로히토가 원했던 바가 아니며, 그 결정은 단지 당시의 총리대신과 각의, 정치인과 군부의 책임인 것이다. 이는 식민지 조선과 태평양 전쟁, 중일전쟁 등 히로히토의 이름으로 이뤄진 모든 침략과 전쟁, 범죄의 책임소재를 당시 수상과 정치인들에게 의한 것으로 격하시키고 결과적으로 히로히토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드는 언술일 뿐이었다.
이후 1990년대에 들어 종군 위안부 문제를 위시한 과거사 책임 문제는 새 국면을 맞이한다. 시작은 앞서 이야기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다. 하지만 이 국면은 단순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 증언된 이상의 요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우선 냉전 구도가 해체되며 냉전 구도에 억눌려 있던 일본의 침략, 식민지 책임 문제가 드러났다. 비록 일본이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시절이던 1972년 중일공동성명을 통해 국교 수립과 동시에 중국 측의 전쟁 배상권 포기를 이끌어 냈으며, 한국과도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청구권 문제를 매듭지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 외의 국가와도 정부 간 청구권 문제를 매듭짓지 않은 경우가 있었으며, 과거사 문제가 하나의 대중적 열의가 투영되는 이슈로 자리 잡는 것을 이런 외교적 방법이 해결할 수 없었다. 그리고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을 전후해 한일 간에 위안부 이슈가 대두된 시점에서 일제 종군위안부 강제 동원 피해자이며 일본에 거주하던 송신도 할머니가 일본 총리의 의회를 통한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소송을 동경지법에 제소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 내에서도 많은 사회단체들이 송신도 할머니에 적극 연대하며 여론을 형성했다.
1993년 7월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단독 과반수가 무너지며 1955년 체제의 균열이 나타난다. 호소카와를 중심으로 한 비 자민당, 비 공산당 연립정권이 들어섰고, 연정 수립 직전이던 1993년 8월 미야자와 내각의 관방장관이던 고노 요헤이가 위안소의 운영, 위안부의 동원과정에서의 강제성과 국가의 역할을 인정하는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이는 이전의 일본 정부의 입장에 비해 분명 진전된 입장이었으며 사과와 책임 인정의 단초를 제공하는 유의미한 담화였지만 담화 자체가 침략, 전쟁범죄에 관한 책임표명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고노담화 직후 들어선 호소카와 내각 등 비(非) 자민당 정권에서도 책임 문제에 관한 더 이상의 진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호소카와 내각에 이어 사회당과 자민당 연립정권인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한다. 사회당 출신인 무라야마 총리는 집권 기간 동안 두 개의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하나는 1995년 태평양전쟁과 이전 시기 일본이 행한 침략과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를 표한 무라야마 담화이며 다른 하나는 담화 이전 1994년 국민성금을 통한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골자로 하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여성평화기금)’의 설립이다.
무라야마 내각 시기 일본의 과거사 인식은 이전보다 진전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무라야마 담화 역시 여전히 천황의 전쟁, 침략 책임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으며, 태평양 전쟁 등 일본의 침략 자체가 불가피 했거나 의도하지 않았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사죄에 이은 배상 문제에 대해서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정리된 문제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담화 이전에 설립된 여성평화기금 역시 이런 흐름과 궤를 함께 한다. 여성평화기금의 구성에서 정부의 역할은 운영재정의 부담에 그친다. 기금의 조성은 일본의 보통 국민들의 모금으로 이뤄졌으며, 무라야마 내각을 이은 하시모토 자민당 내각에서 기금의 부족분을 정부 재정으로 충당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을 뿐이다. 즉 일본이라는 국가의 책임과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그에 따른 구체적인 배상에서 국가는 책임과 역할을 회피했다. 결국 기금의 조성과 운영, 기금을 통한 배상(기금의 지원을 배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은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과정 일체에서 책임의 주체인 국가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과거의 잘못과 고통 받는 이들을 돕고자 하는 ‘선량한 보통 일본 국민’의 마음과 역할만 드러날 뿐 이다.
배상은 법적 개념으로 어떤 잘못된 행위에 의해 발생한 피해에 대한 책임이다. 하지만 책임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배상은 그야 말로 말장난 밖에 되지 않는다. 과거 서독은 나치 독일을 직접적으로 계승하는 국가가 아니다. 양자 사이엔 하나의 강렬한 단절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이란 국가에서 전전(戰前)과 전후(戰後) 체제 사이에 과연 그런 단절성이 존재하는가? 일본은 패전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천황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것이 현재의 상징천황제다. 천황이 비록 과거와 같이 정치적 실권(비록 그것이 작동하지 않을지라도)을 지닌 존재는 아니지만 여전히 일본이란 국가를 그 인신을 통해 표상하고 있다. 헌법이 비록 변경되었지만 천황제의 형태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이는 전전과 전후 모두 동일하다. 태평양전쟁의 선전 교서와 종전 교서의 최종권자는 전쟁 후에도 상징천황제의 형태로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전쟁을 주도한 이들 상당수가 동경의 극동국제군사재판소를 통해 처벌되었지만 적잖은 정치엘리트들은 전후의 일본을 구성하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현재의 일본이란 국가는 과거 서독 보다 과거사에 대해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책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일본 국가는 단 한 번도 자국의 책임을 명백히 인정하고 사죄를 표하지 않았다. 단지 계속해서 일본과 천황의 이름으로 수행된 침략과 범죄, 전쟁을 몇몇 문제적 개인들의 행동으로 치부하고 있고, 천황과 일본 국가는 이에 대해 그저 도의적 책임만을 이야기한다.
이런 일본의 전후 책임 문제에서 우린 몇 가지 중요한 책임 희석의 논리를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로 피해자의 고통을 철저히 돈의 문제로 환원하는 경제주의적 접근으로 여성평화기금이 그 전형이다. 일본은 인도차이나 국가들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피침략 국가들 그리고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과거의 책임을 철저히 돈으로 해결해왔다. 그 과정에서 어떤 책임 있는 사죄의 표현은 잘 이뤄지지 않아왔다. 그런 접근은 시간이 흘러 위안부 문제가 대두된 시점에서 이어진다. 여성평화기금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위로금을 중요한 보상수단으로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고통은 앞에서 말했듯이 오로지 돈의 문제로 환원된다. 특히 여성평화기금을 통한 보상은 그 과정에서 가해자의 책임은 드러나지 않고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그저 선량한 일본 국민 개인들의 선의에 따른 보상만이 드러난다. 그들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는 사회적 연대와 사과, 고통에 대한 응답, 역사에 대한 평가와 재발방지의 노력은 드러나지 않는다.
두 번째 접근은 책임 부정의 논리다. 현 아베 내각에서 총무상을 맡고 있는 다카이치 사나에는 과거 일본 국회에서 자신의 세대는 전쟁 당사자 세대가 아니기에 반성을 하려 해도 할 수 없으며 반성하지도 않겠다고 발언한다. 즉 과거의 잘못을 현재의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부당하다는 논리이다. 일견 다카이치 사나에의 이 발언은 일리 있어 보인다. 실제 일본은 195,60년대 여러 피침략 국가에 여러 명목으로 전쟁 배상금을 지급했다. 이를 통해 형식적으로는 일본이 과거의 침략에 대해 사죄하였고, 결정적으로 현재 세대는 그 침략 세대가 아니기에 자신들에게 과거의 잘못에 대해 책임지길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 그 논지이다. 그리고 이런 책임부정의 논리의 다른 한 축은 위안부의 동원에서 일본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 역시 포함된다. 후자의 논리에서 강제동원은 그저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위해서 갔던 이들이 주장하는 거짓일 뿐이다.
세 번째 접근은 다소 유치하고 졸렬하다. 그것은 위안부의 강제 동원 문제를 희석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발적 참여, 매춘, 어느 정도 눈치 채고도 따라간 사람의 존재, 즉 자발성의 문제를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즉 위안부 전체를 강제로 동원, 수탈된 순수한 여성과 어느정도의 자발성을 지닌 불순한 여성, 혹은 순수한 처녀와 그렇지 않은 이로 분할하는 시도가 이 논리의 핵심이다. 이는 아주 악질적인 논리다. 이 논리는 피해자 집단을 온전히 하나의 총체적 폭력과 성범죄를 경험한 피해자 집단으로 사유하지 못한다. 물론 위안부의 이미지들 특히 정대협이나 소녀상이 표상하는 이미지만으로 사유하는 것은 온전하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의 분리된 접근은 사안의 본질, 즉 구조적이고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동원과 여성 수탈, 국가에 의한 성범죄라는 본질을 은폐하고 개인이 그 사실을 인지했느냐, 어느 정도의 자발성 있었느냐와 같은 문제로 전화해버린다. 그 결과 자발성이 있었던 것으로 간주된 이들은 피해자임에도 마치 보호될 필요가 없는 이들로 전락되고, 본질은 은폐되고 지극히 부차적인 문제가 부각된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피해자들을 피해자로 바라보지 않고, 피해자의 고통과 증언을 그저 부끄러운 일을 들춰내는 것으로 여기는 의식 역시 이런식의 순수성 논쟁과 맞닿아 있다.
세월호를 둘러싼 책임 문제는 여성평화기금에 이르는 90년대 일분 정부의 책임 회피 논리와 많이 닮아 있다. 여기에서도 철저히 경제주의적 시각과 책임 회피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고, 사실 그것의 질적인 측면에선 훨씬 저열하기 그지없다.
우선 세월호 참사에 대한 경제주의적 접근은 크게 두 층위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유가족과 피해자에 대한 접근이며 하나는 여론 형성의 차원이다. 전자의 경우 세월호 참사를 단순한 사건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지닌다. 사건의 해법과 책임의 이행은 단지 피해자와 유가족들에 적절한 보상을 지급하는 것이다. 언론과 일부 네티즌들이 유포하는 보험금 문제, 보상금 문제를 이런 논리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식의 인식에서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하고 있는 책임과 진실규명의 요구는 그저 더 많은 보상금을 받아내기 위한 이기적인 활동으로 전락한다. 이는 앞서 위안부 문제에서 여성평화기금의 보상방식, 그리고 송신도 할머니와 같은 피해자의 사과 요구에 대한 조소에 담겨 있는 정서와 일맥상통하다. 그리고 하나 여론 형성의 차원에서 경제주의적 접근 역시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다. 세월호 참사 이후 5월 초순부터 보수적인 언론을 중심으로 세월호 참사의 경제적 후파, 내수시장과 소비심리의 위축 이야기에 모락모락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한국의 여론 형성 과정에서 보수 언론이 가진 강한 헤게모니는 머지않아 바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많은 이들이 점점 세월호 참사를 유벙언과 구원파의 문제로 이해하기 시작하고, 유가족과 피해자들 그리고 ‘외부세력’의 행동에 지나치다는 의견들이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경제주의적 접근은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활동을 철저히 공격하고 평가 절하하였고, 그들의 도덕적 기반마저 침식시켰다.
또 하나, 책임 회피의 논리 역시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다. 책임 회피의 논리는 크게 국가 책임 인정 여부에 따라 나뉜다.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책임 회피의 논리는 현 정권에 대한 책임 추궁 불가를 주장한다. 즉 세월호 참사의 책임은 이명박 정권을 위시한 지난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를 달려왔던 과거 정권에 있다는 주장이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지 만 1년이 갓 지난 시점에 일어난 사건의 구조적 책임을 현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과하다는 것이 이 첫 번째 책임회피 논리의 요지이다. 이는 마치 위에서 언급한 현 아베 신조 내각의 총무상 다카이치 사나에의 발언과 유사하다. 즉 과거 정권(과거 세대)의 오류와 실책을 왜 현재 정권(현재 세대)에게 요구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고는 국가를 매우 파당적이고, 인격화해서 이해하는 논리적 전제의 오류를 갖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은 비단 민형사적 책임만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이 존재한다. 그리고 국가의 책임과 정권의 책임을 등치시키는 오류 역시 존재한다.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박근혜 정부에 요구하는 책임은 박근혜 개인과 김기춘 개인에 대한 책임 요구가 아니다. 그들이 국가라는 기구, 체제에서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에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요구를 박근혜, 김기춘 개인에 대한 책임 요구로 오독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구조적 문제가 존재하는 사건의 책임이 갓 들어선 현 정권이 아니라 이전 정권에 있다는 식의 사고가 가능한 것이다. 이미 이야기 했듯이 이 구조적 책임은 단순 한 인격이나 파당에 대한 책임과 다르다.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져야하는 책임은 이 구조적 책임이다. 이것은 과거 정권이 국가라는 구조 속에서 수행한 규제개혁정책 대한 책임이며, 그리고 현 정권이 바로 그 정권의 체제를 계승하는 정권이기에 더욱 분명히 져야 하는 책임이다.
과거 히틀러 나치스 정권의 홀로코스트와 폴란드 침략과 이후 서독 사민당 정부의 사과는 이런 면에서 아주 중요한 사례를 제시한다. 나치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이후 독일은 4대 연합군에 의해 분할, 직접 통치를 겪게 된다. 그렇기에 서독은 나치당의 독일제국과 국가 체제로서 구분되는 점이 있다. 그럴히게 서독 그것도 과거 나치에 저항했던 사회민주당 내각이 사과와 책임을 표하는 과정을 우리는 구조적 책임의 실천 과정이란 맥락으로 이해하고 주목해야 한다. 빌리 브란트의 사과가 가능했던 것은 이전 시대의 국가, 구조적. 책임의 문제를 한 개인의 인격, 파당에 있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비록 서독이 나치독일을 명시적으로 승계하지 않더라도 서독이란 국가와 나치독일은 독일사의 흐름과 맥락,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들의 경험에서 하나의 선상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이전 국가의 이름으로 이뤄진 침략과 범죄에 대해서 책임과 사죄가 국가 체제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며 이에 대한 책임을 이행할 의무가 서독에 있는 것이다. 결국 빌리 브란트 정권이 폴란드에 참배하고 사과 한 것은 서독 국민들이 그리고 서독이란 국가가 발 딛고 있는 역사적 책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 세월호 참사에서 박근혜 정권은 이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순수한 피해자라는 허상 역시 세월호에서 비록 크게 드러나진 않더라도 곳곳에 존재한다. 세월호 참사를 문제 있는 배를 저렴한 배삭으로 이용하려던 이들이 당한 사고로 이해는 이들이 세간에 존재한다. 이는 마치 위안부 문제를 자발성과 기만성의 잣대로 분할하려는 시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사실 이는 어떤 반박을 할만 한 가치도 없는 문제제기다. 자유주의 경제학에서는 시장에서 개인이 비슷한 효율에서 더 저렴한 가격으로 재화나 서비스를 향유하려는 것을 하나의 선으로 취급하지 않았나? 세월호 희생자들이 배의 문제를 인지하고도 자발적으로 탔건, 모르고 속아서 탔건 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애시당초 그런 배가 정상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한 관리 체계와 운영의 문제가 더 중요한 문제점이다.
세월호 참사 문제와 위안부 문제 모두에서 드러나는 공통적인 문제는 바로 자명한 책임의 문제에 대해 이를 부정하고 폄하하고 희석하려는 조직적, 지적, 정치적 시도가 이어지고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간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놀랍게도 양국의 정치 구조, 권력 구조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즉 세월호 참사와 위안부 문제는 양국의 정치와 사회에 내재된 어떤 모순이 드러난 계기이며, 그것의 변화를 촉발 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동시에 위안부 문제의 배상 방안으로 일본 측이 추진한 여성평화기금 역시 세월호 참사의 수습 방안의 한 모델로 집권세력에 의해 제시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특별법이 통과된 상황에서 배상을 논의하는 것은 다소 시기상조로 여겨질 수 있다. 현재에 더 중요한 것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 전반이다. 하지만 선체의 인양이 요구되고 정부와 청와대에 대한 조사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른바 완전한 진상규명의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결국 국가는 스스로의 책임을 온전히 지려 하지 않을 공산이 크고, 현실적인 배상을 위해 여성평화기금과 같이 관영 기금도 민영 기금도 아닌 모호한 형태의 배상 기금을 조성할 가능성이 크다. 비록 국가가 세월호 참사에 직접적 책임이 없지만 국가가 국민이 겪은 부당한 희생과 피해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질 것이며, 다수의 선량한 국민의 협력과 모금이 이런 국가의 선의와 함께하는 여성평화기금식의 배상 모델이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지점이 세월호 참사와 위안부 문제 사이의 유사성 내에 존재한다.
그동안 이 글은 위안부 책임 문제의 도래와 여성평화기금의 형성 과정을 살피며 이 과정이 세월호 참사의 책임 문제에 시사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두 역사적 사건 모두 ‘책임’의 문제에 있어 많은 유사한 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새월호 참사에는 과거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재난과 사고가 국가 책임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존재하며, 이는 이전의 사건과 세월호가 구분되는 가장 분명한 특징이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세월호 참사의 수습 과정의 종착역으로 아시아여성평화기금과 같은 형태의 무책임의 배상 체계가 존재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비록 일본의 여성평화기금이 와다 하루키와 같은 양심적 지식인과 활동가들에 의해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10년 가까이 지속되며 나름 개인과 집단의 대표로 어느 정도의 책임을 다 하려 노력한 것에 비해 세월호 참사에서 나타날 것으로 우려하는 국민모금 모델은 그정도의 양심과 책임마저 부재할 것으로 우려된다.
일본의 경우 위안부 문제가 이른바 국체의 책임 문제로 이어진다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수준과 맞닿아 있는데 비해 한국에서 세월호 참사의 경우 세속화된 권력의 정당성, 안정성 문제와 맞닿아 있기에 국민모금식의 배상 체계가 들어선다면 그 과정은 여성평화기금 보다 훨씬 부도덕할 공산이 크다.
다른 한편 필자가 걱정하는 것은 1990년대 위안부 문제를 계기로 열린 ‘증언의 시대’와 거기서 나온 증언들이 동아시아 전체에서 하나의 역사적, 정치적 합의와 공통의 기억, 지역적 이니셔티브로 나아가지 못한채 개별적인 증언으로 노화되고 마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경우 90년대 중반 전후 50주년을 전후해 이른바 과거를 미화하고 현재를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일련의 보수 우익의 운동이 존재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새역모’에 의해 추진된 역사 교과서 집필이었다. 이후 일본 사회에서 과거 전쟁과 침략, 가해의 기억과 책임이 착근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주지하다시피 일본의 경제적 위상의 불안정화, 중국의 부상, 민족주의적 적대의 심화와 맞물리며 일본의 우경화와 더불어 이른바 보통국가화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피해자에 의해 증언된 고통의 기억이 사회적으로 착근하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일을 이러한 일본의 경우와 함께 5.18과 민주화 운동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기억투쟁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볼 때 한국 사회에 하나의 성찰적 계기로 남아야 할 세월호 참사가 진상 규명과 책임 규명에 실패하고 책임에 수반되는 배상으로 나아가는데 실패할 경우 생떼 같은 목숨들이 남긴 그 무언의 증언 역시 뿌리 내리지 못할 것이다. 국가의 무책임과 자본의 탐욕, 관료의 무능과 부도덕한 언론이 낳은 “세월호 참사”는 과연 어떻게 수습 될 것이며, 우리 사회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