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6.
에스노그라피로써 이동근 선생님의 다큐멘터리와 게으른 중앙이란 아포리아(2024.03.06)
photo by 김도균(@moorlin(
약 2주 전, 본소를 함께 했던 영민햄, 덕구와 함께 서경식 선생님의 계승사업 문제에 관해 여러 선생님들께 의견을 듣고자 부산을 다녀왔다. 그렇게 부산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이동근 선생님을 오랜 만에 뵙고 인사 드렸다. 선생님과는 지난 9월 파주 출판도시에서 열렸던 서경식 선생님의 마지막 북토크 이후 처음이었다. 서 선생님의 황망한 부음 당시 짧은 통화를 한게 마지막이었다. 동부산에서 송정 해변으로 접어들자 차의 왼쪽에 내가 참 사랑하는 송정 바다가 펼쳐졌다. 비록 비가 오는 궂긴 날이었지만, 이 송정 바다만의 정서란 것이 있다는 생각이다. 해운대 만큼 아름답되, 해운대 처럼 소란하지 않다. 광안리처럼 번화하지도 않지만 또 다대포 처럼 너무 구석진 느낌도 아닌 송정의 분위기. 그 분위기에 구덕포 올라가는 길에 들어서 선생님 작업실 앞에 도착했다.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 작업실이 있는 건물 이름을 오면서 이야기 했다. 유로하임, 유럽의 집, 유럽의 고향 그간 그 건물의 정체가 궁금했는데 우크라이나와 관계까 있었다.이에 관한 이야기는 영민햄의 페북글에 좀 더 상세히 적혀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아래 링크한 글을 보시기 바란다. 선생님 작업실은 온갖 액자와 인화지, 그림과 책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긴 인사를 나누고, 서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이동근 선생님의 근래 작업들을 보며 선생님의 이야길 듣는 시간을 가졌다. 시간이 화살처럼 날아간다는 표현은 문학적 은유가 아니다. 아 화살 보단 총알이려나?
난 코라나 대유행기 동안 학교의 통일 교육 프로그램에 선생님을 두 차례 모셨었다. 이는 선생님에게 일우사진대상을 안긴 <아리랑예술단 이야기>를 전시로 도록으로 보고 내린 판단이었다.
선생님은 다큐멘터리 작가이면서 동시에 매우 클래식한 인류학자와 같은 분이다. 2000년대 중반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결혼 이주 여성의 유입을 통해 다문화 논의가 일어날때, 선생님은 해운대구청의 외국인 한글 교실에서 잡일을 몇년간 마다치 않으시며 그곳에 녹아 들어가셨다. 결국 한글교실 선생이 되시며 선생님의 초청작 연작이 나오게 된다. 아마 이런 과정이 있기에 얼핏 흔한 가족 사진이 될 수 있는 사진임에도 일반적인 뷰파인더와 피사체와의 거리감이 뭔가 다르게 느껴지는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아리랑예술단 이야기를 작업하신 당시에도 카메라와 8밀리 필름을 들고 예술단과 동행하며 그 삶의 현장에 함께 하셨다. 단지 현장감 있게 생생하게 찍는걸 넘어서는 애정과 관심, 참여와 응답이 있다는 생각이다.
선생님의 검은색 SUV의 마일리지는 40만 킬로를 가르킨다. 10만 킬로만 되어도 낡고 오래 탔으니 팔거나 폐차 하는 세상에 40만 킬로라는 숫자는 우리의 일반적인 거리감을 상회한다. 이에 대해 선생님은 머쓱하이 이래 말씀 하셨다. “이 차는 40만 정도 타줘야 질이 든다 캅니다”
선생님은 코로나를 건너시며 휴전선 접경 지역을 중심으로 작업을 이어가시고 계신다. 군사주의와 한국 고유의 자본주의 에토스가 만들어진 독특한 문화적 코드와 기표들이 전방에는 넘실댄다. 군대를 비교적 북쪽에서 한 이들이라면 이 키치함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단박에 알겄이다. 기묘한 성적 왜곡, 싸구려 감성, 기괴한 전시와 장식, 가짜 무기들. 그리고 우리가 영원히 쉬이 잊어선 안되는 소요산 몽키하우스와 민북마을들, 양구 펀치볼 이주민과 비전향 장기수들.
이동근 선생님의 카메라는 늘 그런 곳들에 닿아 있다. 반짝이고 빛나고 화려한 것들 보다 어쩌면 구조와 권력 바깥에서 비주체로, 2등 시민으로, 하위 주체로 살아가며 목소리를 잃어버린 이들에 대한 에스노그라피가 선생님의 작업들이다. 어쩌면 어떤 집회 현장을 찍고 투쟁의 현장을 찍는것 이상으로 급진저이다. 우리의 사회운동의 급진성은 언젠가 부터 전통적인 경제투쟁이나 민족문제에서 문화투쟁, 정체성 투쟁으로 이동하는듯 하다. 결국 내가 누구인가라는 자각, 물음으로 부터 오늘날 사회운동의 큰 줄기가 솟아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선생님의 이 지극히도 비주류적인 시선과 피사체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비주체와 2등 시민의 문제를 묻는듯 하다. 우리가 사실 주류라고 정상이라고 생각하여도 우리는 무수한 분할선과 교차성 위에 존재한다. 결국은 이것들 간의 연대와 접속에 길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이동근 선생님을 뵙고 대구로 올라오는 길, 영민햄과 덕구와 이런 이야길 했다. 이동근 선생님은 사진계에서 흔히 말하는 두 개의 큰 상을 수상하셨다. 즉 선생님의 사진과 그것이 주는 메세지, 스타일, 이야기들에 대해선 두 말할 것이 없다는 방증일 것이다. 더욱이 나 역시도 그렇고 이 날의 영민햄은 이동근 선생님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선생님이 디스플레이에 투사 된 이미지가 아니라 프린트 된 사진들을 하나씩 넘기며 푸시는 이야기란 것은, 지나가는 소리로 작가가 사진을 펼쳐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하나의 전시 포맷이 될 수도 있겠다 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다. 허나 이동근 선생님이 사진계에서 거두이신가, 선생님의 초청장 연작이, 아리랑예술단 이야기가, 지금 하고 계시는 휴전선 접경 지역에 대한 작업과 적산가옥 연작은 왜 주류 출판계와 언론계에서 노출되지 않는가? 왜 선생님은 막대한 비용이 드는 작업을 오로지 스스로의 자기 규율과 의지만으로 돌파해내고 계시는건가.
언젠가 부터 언론의 기자들이 게을러 졌다는 이야길 주변과 자주 한다. 중앙지, 특히 진보 성향의, 필진 개편만 봐도 우스개 소리로 돌려 막기라 할 정도로 풀이 협애하기 그지 없다. 경향에 쓰던 사람이 한겨레에 쓰고 한겨레에 쓰던 사람이 오마이에 쓰고 오마이에 쓰던 사람이 경향에 쓴다. 이는 역설적으로 진보적 필자층의 얇아짐을 뜻하기도 하지만, 이 필자들을 수배하고 섭외하는 기자들의 지적 시선과 사회적 바운더리가 과거에 비해 엄청 좁은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자아낸다. 한국의 지리 정치 모델에서 서울은 하나의 지방이자 동시에 그 지방들을 묶어 내는 중앙의 이중적 지위가 있다. 이 중앙의 도덕적 성실함과 책임감, 다른 지역을 타자화 하고 내외시 하지 않는 태도야 말로 이 중앙으로 접속 된 구조의 공화국이 재생산 되는 윤리적 토대일 것이다. 허나 지방에서 아무리 좋은 연구를 하고 아무리 좋은 작업을 해도 서울의 중앙 촌놈에 노출되긴 쉽지 않다. 잉는 역설적으로 중앙이 중앙으로서 전체를 보기 보다 그들의 공간에 머물러 있다는 의혹을 불러온다. 그래 생각하면 여러 재능에도 기회를 못 받는 재향의 고수들이 여럿 있다. 내겐 이동근 선생님이 그런 분이다. 기자층의 계끕적 구성, 사회적 구성(학연 등)이 좁아지는 것은 이 중앙됨의 윤리를 약하게 만든다. 다양한 배경의 미디어들(마냥 신문만이 미디어는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도 미디어다.)이 중앙의 구조에 기입되고 중앙은 이를 환대할 의무를 가진다. 그저 흔해 빠진 비슷한 배경이 이어지는 이상 게으른 서울 촌놈이란 오명을 벗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