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없음이 너의 없음을 만날 때
지독하게 마신다. 마치 흐느낌과 호흡이 뒤섞여 만들어지는 그 마찰과 파열의 소릴 감추듯 흐느낄 타이밍마다 그는 자신의 흐느낌에 소주를 뒤섞어 삼켰다. 그러나 그렇게 흐느낌을 소주에 섞어 삼켜도 고통과 슬픔이 알콜처럼 휘발해 사라지진 않는다. 그저 그렇게 다음 흐느낌의 순간에 투명한 소주를 다시 삼킬 뿐이다. 상대하는 남자는 여자의 들이킴 앞에 무엇도 묻지 않는다. 왜 그래 술을 마셔대냐, 무슨 곡절이냐, 괜찮냐. 술과 원수인가 등 대개 인간들이라면 그런 것을 물을 것이나 남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저 이야길 들어주고 잔을 채워주고 가끔 안주를 권하다 술에 취해 김수영의 시를 흥얼거리는 그를 엎어 데려다준다. 그가 남긴 것은 닫힌 문 앞 복도의 센서등 하나 밝혔을 뿐이다. 그리고 반복된다. 데자뷰인가 싶지만, 옷도 장소도 다르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반복된다. 여자는 호흡 대신 마시기를 택했다. 이 정도면 인간은 이산화탄소와 산소를 교환하는 동물이 아니라 알콜을 교환하는 동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시고, 남자는 또 묻지 않고 그저 술에 취한 그를 엎어다 집에 데려다준다. 또 그저 복도에 등 하나 더 밝힐 뿐이다.
카메라는 마치 연극 같은 이 장면을 엄청난 미장센이나 기교 없이 그저 두 사람의 반복 되는 행위에 집중하여 비출 뿐이다. 거기엔 그저 마시는 이와 듣는 이와 소실점만이 있다. 묻지 않고 들어주는 둘은 세 번째 반복에서야 서로의 이야길 꺼낸다. 이혼 후 양육원을 갖고도 아이를 빼앗긴 국어 교사 영경과 열심히 쇠를 깎았으나 납품처에 배신당하고, 경제적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집과 재산을 가지고 떠나버린 아내, 그리고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몸이 무너져가는 환수. 둘은 서로에 관해 묻지 않고 마시고 듣고 들어주었다. 그 끝에서 영경은 말한다. 환수의 없음을, 그리고 자신의 있음을. 그러나 여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현대에서 사랑은 하나의 감정과 그것 간의 교감을 넘어 복잡한 사회경제적 조건의 싸움이 되었다. 어느새 인간관계가 그러했듯이 사랑 역시 계산 가능하고 합리와 이성의 계산 가능함으로 포획되어 버렸다. 현실이란 이름으로 사랑에는 집이, 차가, 통장이 필요했다. 나의 있음은 너의 없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너의 없음은 나의 있음을 위협하고 탈취하려는 연약함이다. 이 두려움 앞에 난 나의 있음을 너의 있음에 견주고 헤아려 교환한다. 말이 되는가. 있음과 없음이 교환되지, 있음과 있음이 교환 되는 건 무엇인가. 사랑은 화폐 자본과 같이 축적 가능 한 투기의 영역인가?
프랑스의 윤리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나의 존재를 타자를 위하여 선출된 것과 같다고 말했다. 나의 자유, 나의 있음, 나의 주거 그 모든 것이 사실 나의 자기 만족과 중심을 위함이 아니라 언젠가 어디선가 나타나 계속하여 나에게 책임과 응답을 요구하는 타자의 얼굴을 향한 책임에 있으며, 세계를 향유하는 주체에서 응답하는 주체로 나아갈 것을 이야기한다. 나의 있음을 지키기 위해 너의 없음을 거부하는, 이 어찌 보면 홉스적인 이성-소유 중심의, 사고 속에 사랑이란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정신 현상 마저 계측 된다는 것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인가.
그러나 그들에겐 이 조건의 관계(집의 유무, 직업의 차이, 경제적 여유)는 상대를 거부할 이유로 작동하지 않는다. 영경과 수환은 그보다 각자가 잃어버린 것, 빼앗겨 버린 것들이 남긴 연약한 존재 위 공동들을 응시한다. 살아갈 길은 없지만 죽을 길은 있다는 수환의 말은 이 고통으로 가득 찬 삶에서 이 사랑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탈과 죽음의 희망인 것처럼 읽히게 한다. 어떤 사랑에겐 죽을 길이 희망일 수도 있다. 그들의 사랑은 죽음을 향해 간다. 고통과 결여에 의한 마음의 공동 속에서 묻지 않고 듣는 돈 없는 남자와 살아갈 이유를 빼앗긴 채 죽어가던 돈 없는 남자는 서로가 가진 것들로서 함께 죽음을 향해 함께 나아간다.
예전에 어느 문학가였던 것 같다. 사랑을 절대적인 동일성의 욕망이라고 하였던 기억이 난다. 아마 대개 많은 이들이 이렇게 사랑을 결속을 통한 어떤 완성에 대한 희구 같은 것으로 이해하지 않나 싶다. 혹은 결여로부터의 완전해짐에 대한 갈구 역시 비슷한 궤일지 모르겠다. 네가 나와 같길, 내가 너와 같길, 하나가 되길 그 속에서 무언가 완전함을 이루길 갈구하는 욕망들이 아마 그런 절대적 동일성을 향한 욕망이 아닐까. 아마 저 누군가의 정의에 비춘다면 수환과 영경의 사랑은 사랑이 아닐지 모른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대한 인정과 연민이 그들의 사랑이다. 그들은 어쩌면 죽을 길을 택한 순간부터 전형적 의미의 동일성의 완결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지향으로 상대를 규정하고 선 그으며 중증알콜중독에게 술을 먹지 말라 하기보다 술을 참는다고 며칠간 고생했으니 마시라는 그 인정과 연민. 과연 이건 가능한 사랑일까. 한편으로 이는 출발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죽음의 이야기이고, 시작의 이야기지만 낙화의 이야기기도 하다. 그 출발도 죽음도 시작도 낙화도 애타게 마음에 서두르지 않는다. 거기엔 찬란한 결실과 같은 혁혁한 업적 역시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저 아프고 연민하고 기다리고 들을 뿐이다.
우린 황금률의 철칙 아래 살고 있다. 사실 등가 교환이란 것이 가진 높은 수준의 상대성과 간 주관성을 이해할 여지는 오간 데 없고 그저 액면가 간의 교환 체계(밥값에서부터 시작해 감정에 이르는 체계) 아래 살고 있다. 이 황금률의 철칙은 공자도 논어 안연편에서 중공(염옹)에게 했던 이야기고, 누가 복음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우 받고 싶은 만큼 대우하라, 등가 교환의 법칙은 그저 ‘강철의 연금술사’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가 아니라 우리 세계의 철칙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그 가장 퇴락한 현실에 서있을지 모른다. 더치페이가 문제가 되는 세계다. 조금의 양보도 희생도 재무재표 상의 손실로 잡히는 이 사회에서 영경과 수환의 사항은 좌변과 우변 중 어디에 기입 되어야 하나. 그들은 자신의 것을 내어줌으로써, 영경은 집과 돈을-수환은 남지 않은 시간을, 서로를 사랑했고 연민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비록 죽음을 향할지언정 선물이었다. 사람됨의 공간이자 존재의 인정으로 나를 혹은 나의 것을 내어주는 선물, Gift와 구분 되는 Present로서 선물을 그들은 서로에게 선사했다. (Present의 어원 격인 라틴어 Praeesse는 존재(Esse)란 개념과 상관이 있다. 는 존재와 연관된 단어라 알고 있다)
술과 사랑이 서둘러 깨지 않길 바랐던 둘의 사랑은 깨고 싶지 않은 목련 만개한 봄처럼, 깨고 싶지 않은 알콜의 순간이 일순간 사라지듯 끝나버렸다. 둘이 있던 방은 환자용 침대 하나만이 덜렁 남겨진 병실이 되었다. 이미 사라진 꽃을 찾아 복도를 떠돌며 비통해하는 한예리의 모습이 오래 생각날 것 같다.
* 선물 문제는 좀 다듬을 필요가 있다. 이와 관해선 사랑하는 친구이자 스승이며 동료인 철학연구자 권영민형이 밀크코리아에 쓴 <선물의 의미>를 찾아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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