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르의 상상력을 초과하는 현실
사이언스픽션(Science Fiction)이나 사이버펑크(Cyber-Funk) 만큼 자유로운 비판이 가능한 장르가 있을까? 아마 일본 전후 민주주의와 전공투 세대의 비판 정신이 가장 매섭게 살아있던 재패니메이션의 장르가 SF와 사이버펑크였던건 이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원령공주>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미래소년 코난>에서 전쟁과 원폭, 생태 파괴 문제를 판타지나 SF란 장르를 통해 비판하고, 오시이 마모루가 <인랑>과 <공각기동대>, <기동 경찰 패트레이버>(정확히는 그 극장판)에서 국가 폭력 기구의 비인간성이 초래하는 억압이나 난민 문제 등을 매개로 정치권력을 통제하려는 시도 등을 예비 한 점, 토미노 요시유키가 <건담> 시리즈에서 지구 연방으로 표상되는 타락한 금권의 지배와 책임지지 않는 관료제 그리고 거기 맞선단 명목으로 비인간화-전체주의화 된 지온을 통해 보여준 것들 모두가 이 장르적 상상력의 자유로움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런 면에서 장르적 상상력이란 것은 현실로부터 상상의 세계가 매개 되지만 어느 정도는 현실을 초과하여 공상 같으나 그 공상에 내재한 구체적 리얼리티를 가지고 그것이 다시 현실에 투영되어 현실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하는 그런 힘일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이런 장르적 상상력이 두 개의 전혀 다른 방향성에 질식되고 있다. 하나는 이른바 세카이계로 불리는 재패니메이션의 사소설화다. 세카이계란 것은 앞서 언급된 작품들이 세계 수준의 거시 사건 속에 놓인 개인들이 그 거시 사건과 마주하고 이와 부딪히는 서사라면 이 세카이계에선 이 거시 세계는 그저 하나의 배경으로 전락하고 그 속에 놓인 주인공 개인과 그 주변 이들의 관계와 감상, 인상들만이 이야길 지배한다. 이는 어쩌면 건담과 에반게리온의, 미래소년 코난과 신카이 마코토의 ‘포스트 후쿠시마 3부작’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 장르적 상상력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는 현실이 상상력을 초과하고 있단 점이다. 드론이 인간을 공격하는 아프간과 우크라이나 전쟁, 스노든이 폭로한 광범위한 감시 감청 프로그램의 존재, 영국의 브렉시트, 3·11 후쿠시마 원전 폭발 당시 보여준 일본 정부의 무기력과 무책임, 한국에서 일어난 법률 엘리트와 군부 엘리트들의 친위 쿠데타 시도, 트럼프가 만든 국경 장벽과 보호무역, 이주민 추방 등 불과 15년 상간에 이뤄지고 있는 세계의 변화는 지난 시절 우리에게 비판의 공간이었던 장르적 상상력의 여지를 닫아버리고 있다. 며칠 전 친구인 영화 평론가 조재휘 선생과 한 우스갯소리, 김문수가 김영삼이 보수에 심은 트로이목마고 윤석열이 문재인이 심은 트로이목마인 거 아니냐,가 현실의 괴상하고 비틀림 속에서 어쩌면 현실일지 모르는-현실이 상상을 너무 초과하여 사실과 상상이 헛갈리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포스트 트루스란 어쩌면 현실이 현실감을 유지토록 하는 핍진성을 스스로 파괴하고 예측 가능성을 무너트려 상상을 초과하기에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신 고질라>(2017)나 <플랜75>(2024)가 그랬듯 여전히 상상력은 우리가 현실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어쩌면 유일한 공간일지 모른다. 고질라의 등장으로 초토화 된 도쿄도와 그 와중에서 우왕좌왕하는 정부의 모습으로 비친 3·11 후쿠시마 원전 폭발의 무기력과 무책임이나 플랜 75가 보여준 노인을 안락사시키는 국가의 비상 대책으로 제시되고 누군가 단지 나이가 들었단 이유로 죽음으로 한 사회의 안정과 행복이 유지된다는 상상은 비록 이미 현실에 상상을 넘어 현실에 도래하고 있을지 모르는 현상일지라도(국민연금을 폐지하자는 젊은 극우나 여성의 성에 대한 폭력을 노골적으로 묘사한 이 모 의원이나, 재난 앞에서 책임지지 않는 이태원과 세월호의 정치) 그런 현실을 드러내고 반추하는 마지막 비판의 보호구역일지 모르겠다. <해피엔드>는 이처럼 현실이 상상력을 초과하는 폭력과 배제의 시대에서 상상력이 어떻게 다시 현실의 가능성을 말하는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같다.
2. 유타와 코우, 단층과 파열
<해피엔드>는 레이와 시대의 연장에서 근미래를 살아가는 다섯 친구의 이야기다. 아 조금 더 정확히는 유타와 코우 그리고 교장이나 교사로 표상되는 국가 권력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음악을 사랑하는 ‘순혈’ 일본인 유타, 재일조선인 4세 코우, 대만과 일본 혼혈인 밍, 미국과 일본 혼혈인 톰, 이 친구들 사이의 분위기 메이커인 아타, 이 다섯은 출신이나 배경, 피부색, 국적을 넘어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지낸 사이다. 이들의 우정이란 고3 어느날까진 어떤 동질성 위에서 유지됐다. 어린 시절 아마도 같은 유치원에서 만났다는 동질성은 이들이 처한 배경과 조건의 차이보다 더 강하게 이들의 우정을 지탱했다. 그러나 이 동질성의 우정은 어느날 단층을 맞는다.
경찰들의 단속을 피해 공연을 본 어느날 자신들의 피난처인 음악 연구모임 동아리방에서 전자음악을 즐기던 코우와 유타는 문득 교장의 노란 스포츠카를 보고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것은 어떤 교장의 권위에 대한 반항보다는 그저 단순히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의 의미로 장난에 가까웠다. 다음날 자신의 아끼는 스포츠카가 뒤집어 허공에 서 있는 이 모습에 교장은 단호히 외친다. ‘이건 테러입니다.’ 그리고 마치 판타지처럼 도쿄에 강진이 엄습한다. 이미 작의 시작부터 이어져 온 경찰 국가적 분위기와 중간에 복선으로 깔린 내각 총리대신의 ‘비상대권’에 대한 언급은 이 강진과 자동차의 우뚝 솟음과 맞물려 공안과 감시, 훈육 국가로 현실에 들이닥친다. 안전이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사회가 되고 불심검문이 일상화되며 100년 전 간토 대지진의 데자뷰처럼 외국인들에 대한 적대와 증오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한다.
학교에는 최신형 얼굴 인식형 인공지능 감시 장비가 도입된다. 얼굴과 개개의 행동을 인식하여 벌점을 먹이는 감시-제재 장치의 등장 앞에서 다양한 배경 속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평화로워 보이던 학교의 일상은 대지진으로 갈라진 단층처럼 갈라져 버린다. 자위대원이 학교에 강의를 나오며 비국민과 순혈 국민을 구별하기 시작하고, 안전을 빌미로 오인조의 피난처인 음악 연구동아리 방은 퇴거당하고 음악 장비는 압수되어 ‘안전’한 공간에 감금된다.
이 목적 없는 테러와 지진은 그간 은폐 된 두 개의 세계를 드러낸다. 일본 순혈인 유타는 거시 세계에 대한 어떤 의미와 기대도 없이 그저 자기 만족적인 음악에만 매몰되어 있다. 그 마음속에는 지독한 현실 제약주의와 순응이 자리 잡고 있다. 해봐도 되지 않는다는 무기력과 자발적 패배가 유타로 드러난다. 한편으론 그런 것보다 나의 행복, 나의 즐거움, 나의 음악이 중요한 이 체제의 전체 주의성 속에서 자기만족과 자기 안락을 위해 예속과 순응을 받아들이고 자기 음악이라는 도피처이자 찰나적 자기 안락이 위협 받는 상황에만 예민한, 일견 후지타 쇼조의 안락 전체주의가 연상 되는, 그런 캐릭터가 유타다. 그에 비하면 코우는 재일조선인으로 특별 체류 허가증을 요구 받음으로 늘 합법 체류와 안전함을 검증 받길 요구받고, 또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기에 끊임없이 교장으로부터 장학금 추천 문제로 압박을 받고 있다. 좋은 집에서 비교적 경제적 형편이 괜찮아 보이는 이 둘은 먹는 음식들마저 다르다. 단지 두 세계의 경계를 느끼는 감각이 갑자기 열렸을 뿐이다.
결국 이 감시-제재 장치의 억압성을 느낀 일본인 학생들과 외국인 학생들의 소극적 저항은 좀 더 본격화되어 외부의 집회에 참여하고 더 나아가 마침내 교장실 점거 농성이 시작된다. 교장의 무수한 회유와 압력, 강압 속에도 학생들은 끈끈하게 서로의 곁을 지켰고, 비록 교장 개인의 양심에 의지할 뿐이나 이 감시 장치의 철거가 논의된다.
서로의 관계를 지탱하던 허위의 동일성은 그렇게 두 개의 이분법으로 나뉘어졌다. 자위대원의 특강 장면은 가장 상징적이다. 일본인이 아닌 학생들은 다른 방으로 가라는 말은 이 친구들의 우정을 지탱해 온 동질성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드러낸다. 그들은 일거에 순혈 일본인과 순혈 일본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타자로 분할되었다. 졸업식을 앞두고 교장과 일장기 앞에 90도 인사를 해야 하는 이 군국주의적 풍경을 앞두고 교장은 이 감시 장치의 철거를 위한 단서로 차량 ‘테러’ 주범의 자수를 요구한다. 졸업생들은 이 철거를 두고 논쟁에 빠진다. 비판적 학생들과 이주민들은 반발하고 일부 순혈들은 안전과 규범의 준수를 위해 이를 옹호한다. 그 속에서 자신의 여유로움, 자신의 만족, 자신의 즐거움을 고수하던 유타가 나선다.
3. 테러도 응답도 불가능한 사회
우리에게 극 중의 세계는 새삼스러운 세계가 아니다. 우린 지난 연말, 법조 엘리트 출신 대통령의 현실 인식 능력과 논리적 사고 능력의 결여가 의심스러운 비상계엄을 겪었다. 양민 학살의 주범 이승만도 국회 의사당에 군을 투입하진 않았지만, 윤석열과 그 법조, 군사 엘리트들은 근거 없는 확신과 망상 아래 선관위와 국회 등에 군을 투입했다. 성 비위로 쫓겨난 전직 군인으로 이 사건의 모사였던 아무개의 수첩에는 구체적이고 경악스러운 후속 조치들이 담겨 있기도 했다.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지시키고, 헌법 기관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일체의 출판과 집회 결사의 행위를 중단시키는 이 초유의 헌정 탈취 시도는 실체 없는 중국 간첩과 이적 세력에 대한 허상이 그 명분이었다.
면역은 우리를 보호하는 장치이다. 토머스 홉스 적 세계에서 우리는 외부로부터 생명과 재산, 존엄을 지키기 위해 거대한 방어 장치에 우리의 권력을 양도하였다. 그렇게 우리의 근대 국가는 외부의 이질적이고 불안하고 알 수 없는 요인들로부터 안전하고 정제된 삶을 보장했다. 차단과 방어의 면역 논리가 이 근대 국민국가를 지탱했다. 그러나 이 면역의 과잉과 자립화는 면역 체계가 본디 본래 지켜야 할 대상을 공격하고 그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탈취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자가면역질환에 대한 발견은 놀랍게도 이러한 근대 국민국가의 공안화를 설명한다. 일본 사회의 안전을 위해 민주주의와 시민의 자유를 제약한다는 극 중의 일본 총리와 윤석열의 내란 세력은 얼마나 서로 닮아 있는가. 9·11 이후 외부 세계와 타자에 대한 방어적 면역의 강화가 어쩌면 트럼프와 MAGA를 만들었을지 모른다. 이 자립화되고 과잉 된 공안 질서는 자신이 본대 내재적 사명으로 지켜야 할 규범과 원리, 가치마저 위협하고 있다. 극 중의 테러 소란은 퇴학을 각오하고 맞선 친구들에게 응답한 유타의 고백으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윤석열의 내란은 국민과 국회의 직원과 보좌관들이 총부리 앞에 서서 이를 응시하고 버티며 밤공기를 맞아가며 막아냈다. 서울 도심으로 들어오는 장갑차에 항의 한 시민들에게 이 풍경은 천안문과 12·12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극 중에서도, 우리의 지난 겨울의 기억도 당면한 문제를 넘어섰을 뿐이다. 이 자가면역의 심성은 이제 단지 소수 엘리트와 공안 권력의 손을 떠나 마치 Tea Party의 그것처럼 대중 사회의 심성 속에 자리 잡았다. 당파적 필요로 사실이 선택되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고, 당파적으로 구성된 진실을 맹신하는 반지성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삶과는 무관하다는 안락 전체주의, 그리고 이 모든 것 와중에서 나의 자기 만족적 삶을 추구하는 체념과 냉소가 있는 한 21세기 전체주의의 불씨는 꺼지지 않을 것이다.
4. 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피난처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고전문학 교사인 그레고리우스는 우연히 주운 책의 이야길 쫓아 예정에 없던 리스본으로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여정 속에서 자신이 주운 포르투갈의 살리자르 독재 정권 아래에서 저항하던 누군가의 글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책의 이야기를 밝혀내는 여정의 와중에 책의 한 줄이 소개된다. Imagination is our last sanctuary(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피난처다.)
지난 6월 말에서 7월 중순에 걸쳐 재일조선인 지식인 고 서경식 선생님의 유고 칼럼집 『어둠에 새기는 빛』(2024, 연립서가)의 북토크를 대구와 서울에서 진행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그 북토크에 대한 소회를 탈고하길 바란다..좀) 『어둠에 새기는 빛』은 선생님께서 한겨레에 기고하신 칼럼을 중심으로 한 90편의 짧은 글들을 엮은 책이다. 그렇기에 그 책의 큰 주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건 만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편집자 최유철 선생님의 편집을 따라가다 보면 몇 가지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첫째, 『어둠에 새기는 빛』은 비속해지고 냉소와 반지성, 무기력이 팽배해지는 세계에 대한 비판의 의미가 있다 생각된다. 둘째, 그럼에도 이런 비속화와 비인간화, 냉소와 반지성의 시대에도 희망은 도서관이나 미술관으로부터, 세계와 타자의 존재를 감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그리고 더 나아가 응답하고 연대 할 수 잇는 가능성에 있을지 모른다. 이 두 가지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선생님은 과거 탄광 속의 카나리아란 표현을 즐겨 쓰셨다. 그러나 책의 표지인 프란시스코 고야의 ‘개’는 유사에 빠져 하늘을 향해 짖는, 어쩌면 다소 지치고 희망을 잃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카나리아가 비판과 경고를 통한 세계에 대한 나름의 가능성을 말하는 조금은 더 젊고 전투적이던 선생님을 상징한다면 저 개는 이제는 약간은 지친 그러나 희망을 놓을 수 없는 노년의 선생님 같은 느낌이 있다.
돌이켜 보면 <해피엔드>의 감독 네오 소라의 아버지이자 또 다른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 류이치 사카모토 선생님과 서경식 선생님이 연이어 떠나셨다. 그 사이에도 일본, 과 동아시아한국은 아니 세계는 더욱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이 냉소와 무기력의 시대에 혁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우리의 가능성이 이 거대한 현실보다 아직은 다만 몇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고 더 많은 이들과 손잡을 가능성을 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프라도의 글귀처럼 상상력은 우리에게 마지막 피난처일지 모른다. 그 상상력에서 우리의 우애와 우리의 연대가 시작된다. 해피엔드는 그 상상력을, 그것이 자랄 미술관과 영화관, 도서관과 서점에서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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