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 May 31. 2023

결혼비용을 정산하는 마음

천만 원의 플렉스

가계부를 쓰지 않은지 한참 되었다. 뱅크 샐러드 혹은 토스 어플의 도움을 받아 그동안 내가 쓴 카드 내역을 분석해 보긴 했지만 매번 그때뿐이었다. 어플을 돌리면 나오는 단 한 문장.


소비의 90%가 '쇼핑'입니다.


쇼퍼들의 죄책감은 그때뿐이다.  내 행동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월급이 그대로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불상사가 연달아 일어나면 직장 생활 10년 차 짬밥으로 한 곳에 모아둔 비상금을 깼다. 예금 해지 그리고 나머지 예금. 주식 매도 그리고 다시 매입. 무한 반복. 그러나 결혼 준비를 할 때만큼은 타고난 쇼퍼인 나조차도 똥줄이 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웨딩홀 비용부터 뭉텅이로 나가는 바람에 소비를 한껏 줄여야 했다. 항상 천만 원 한 번 쓰는 것보다 백만 원 열 번 쓰기를, 백만 원보다 십만 원 열 번 쓰기를, 십만 원 쓰기보다 만원 열 번 쓰기를 선호했던 내게, 몇백만 원씩 나가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단 하루를 위해서 말이다.


삼백명의 하객 위한,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리 가족을 위한. 그러한 천만 원의 플렉스. 이것은 이전에 해보지 못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오랜 기간 동안 결혼 준비에 집중했다. 년 전 <애쓰지 않고도 사랑>을 쓰고 있던 내가 가장 원하던 것이 결혼이었는데 막상 준비가 시작되고 쓸데없는데 돈이 많이 들어가자 로망 따윈 돌아볼 필요가 없는 부분이 되었다.


결혼 준비 과정 중 가장 돈 쓴 보람이 있었던 것은 남자친구의 양복을 맞춘 일이었다. 결혼 준비 기간 동안 마주친 업체들 대부분 구매자가 계약금을 내면 그 뒤에는 답장이 뜸해지거나, 귀찮은 티를 팍팍 내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남자친구의 양복을 맞춘 A 업체는 내가 전면에 나서서 뭔가 요구하지 않아도, 예약일에 맞춰 방문할 때마다 일의 진행 상태를 꼼꼼하게 살펴주었다. 결혼식 전날 대여한 드레스 앞섬에 단추가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A 업체는 신부님이 알아서 하라는 말 대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신속하게 응대했다.


나는 소심하다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소심한 사람이라서 어디서든 항상 제대로 된 요구를 하지 못해 손해 보는 일이 잦았다. 또한 이런 결과는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한 번에 제대로 전달하는 능력이 부족해서이기도 한데, 이번에 결혼이라는 큰 일을 겪으면서, 내가 굳이 말 한마디 더하려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는 그들이 고객의 입장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꾸준히 생각해 온 결과가 아닐까 한다.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웨딩홀 대신 전 직장동료와 친구 여럿이 결혼한 웨딩홀. 제법 헌 티가 나는 촬영 드레스와 무난한 색감의 웨딩 스튜디오. 이름 없는 웨딩 밴드. 평소에 입기 편한 양복 원단. 오픈런 예약에 실패해 차선으로 선택한 상견례 식당. 필요 없는 금박과 가공을 덜어낸 청첩장. 뭔가 나의 결혼식은 인스타그램에서 보던 것보다 이 프로씩 부족해 보였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챙겨주는 사람들 덕분에 돈 쓰는 보람이 있하루였다. 이건 명품을 사는 일과는 느낌이 다르다. 내가 받았던 친절은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도 애매한 그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내게 친절을 베푼 사람들도 그날 내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름을 잊어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나는 식이 끝난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그런 것들.


내 결혼식은 원래 시보다 십 분 늦게 시작했다. 앞 타임 결혼식이 인싸 두 명의 만남이었는지 사진기사가 하객 사진을 끝없이 찍고 있었다. 앞선 결혼식이 늦춰진 탓에 신부대기실에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덩그러니 혼자 남아있었고, 웨딩홀의 대응 방식에 화가 날만한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했다. 기다림이 끝나고 누군가의 부름에 따라 신부대기실에서 내려와 입장하기 직전 치맛자락을 게 쥐었다. 드레스가 생각보다 길었고 버진로드에서 혹시라도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일을 겪기 싫었 때문이다. 문 앞에서 스냅 작가분과 헬퍼 분이 다가와 속삭였다.


신부님. 뒷타임이 없으니 식은 문제없을 거예요. 괜찮아요. 괜찮아. 잡했던 장 내부가 정리되고 그들이 원래 자리로 돌아다. 이제 나 혼자 이곳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내내 보이지 않는 도움을 받는다. 다 괜찮다고. 이곳으로 가시면 된다고. 드레스를 밟아 넘어질 뻔할 때마다 누군가의 손을 쥔다. 결혼식이 끝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final>을 맞이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