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

이것은 픽션입니다만?

by 이섬



파팟.


지수의 손등이 스칠 때마다 현호의 말초신경에 전기가 일었다.

첫사랑이었다.


현호의 첫 꿈은 과학자였다. 옆집 형에게서 물려받은 과학백과전집을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다 읽은 것은 물론이고, 어떤 건 십수 번을 다시 읽느라 양장 제본이 너덜너덜한 지경이었다. 여느 일곱 살이 그러듯 공룡, 화산, 태양계, 별도 좋아했지만, 일의 단위가 줄(J)이라든가 플레밍의 왼손 법칙 같은 개념들을 뜻도 모르면서 달달달 외우고 다녔다. 덕분에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진 과학 과목이 수월했고 이듬해엔 문과생이 되었다.

엉덩이에 땀이 흥건하도록 가만히 앉아 수능 공부를 했지만 실은 학창 시절 내내 예체능 특기생이 되고 싶었다. 그러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서 돈이나 빨리 벌고 싶었다. 그만큼이나 공부를 싫어하는 것치고 성적은 늘 양호했는데, 현호는 이를 자신의 인생에 걸린 저주라고 생각했다. 실은 저주가 아니라 시키면 시키는 대로 곧잘 순종했던 자신이 벌인 자승자박이라는 걸 깨달은 때는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뒤였다. 효(孝)를 저버리는 선택을 했어야 했는데, 孝仁忠義禮廉節, 하필 가훈의 첫 글자가 효였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현호가 집안 어른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을 꼽으라면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살 생각은 하지 말아라"일 것이다. 주말마다 사생대회에 나가 상을 받아오던 10살 때에도, 검은 띠를 앞두고 태권도 선수를 해볼까 고민하던 12살 때에도, 처음으로 기타를 잡았던 14살 때에도, 언제나 칭찬이나 격려보다는 저 말이 먼저 날아들었다. 어른들은 뭐가 그렇게 불안했던 걸까. 정작 현호는 그것들로 밥 벌어먹을 생각 따위를 한 적이 없었다.



파팟.


모든 게 쓸모 없어졌고, 모든 게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열다섯이었다.


이등변 삼각형으로 꾹꾹 눌러 접은 쪽지 하나가 발단이었다. 종례를 마치고 서둘러 나가려던 현호의 어깨를 누군가 톡톡 두드리더니 쪽지 하나를 손바닥에 쥐여주었다. 지수였다. 혼자 있을 때 몰래 보라고 했지만, 현호는 교문을 나서자마자 쪽지를 펼쳐 들었다. 꾹꾹 눌러쓴 귀여운 글씨가 와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별생각 없이 읽었고 별 내용은 없었다. 다른 친구에게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같은 반이 되어서 반갑다고, 친하게 지내자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했다.

답장을 썼다. 서랍 깊숙이 처박혀있던 편지지를 꺼내 구겨진 모서리를 다듬어 펴고, 잘 쓰지도 않는 초록색 잉크 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씩 꾹꾹 눌러썼다. 바로 다음날, 종례를 마치고 나가는 지수의 어깨를 톡톡 치고는 교복 주머니에 쪽지를 넣어주었다. 현호는 지수의 눈빛에 떠있던 물음표가 찰나에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을 보았다. 별생각 없이 썼고 별 내용은 없었다. 친구에게서 쪽지를 받아본 건 처음이라 재밌었다고, 써준 정성에 보답해야 할 것 같아서 답장을 쓴다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답장이 왔다.

짧게는 매일, 길게는 사흘에 하나씩 쪽지를 주고받았다. 서로 경쟁하듯 글씨를 정성 들여 썼고, 온갖 종류의 편지지와 온갖 색깔의 펜들이 동원되었다. 반년쯤 되었을 때는 지수의 쪽지만을 보관하기 위한 상자가 필요했는데, 현호는 밸런타인데이 때 받았던 초콜릿 상자 중에서 가장 단단하고 큰 상자를 골라 속을 비웠다. 매번 별생각 없이 썼고 별 내용은 없었다. 도덕 선생님이 싫다고, 한자 숙제가 힘들다고, 교회에서 수련회에 간다고, 용돈을 하루 만에 다 썼다고, 주말에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했다. 숨길 것도 없었지만 어쩐지 지수와 현호는 쪽지를 매번 몰래 주고받았다.



파팟.


결국 사달이 났다.


첫사랑이라 그게 사랑인지도 모르고 사랑을 했다. 새까만 피부에 깡마른 몸이라 정말로 볼품없어 보이는 애였지만, 가지런한 치아와 뭉툭한 손마디와 눈 밑이 가득 차오르는 눈웃음과 옷에서 풍기던 깨끗한 세제 냄새와 부드러운 피부결이 매일같이 현호를 미치게 만들었다. 매일 밤마다 그 애와 맨살을 맞대고 껴안는 상상을 했고, 아침을 찝찝한 기분으로 맞이하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모든 게 쓸모 없어졌고, 모든 게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그러자 모든 게 궁금해졌다. 정말로 모든 것이.

현호는 자신과 함께 있지 않는 모든 시간의 그 애를 궁금해했다. 또한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애의 모든 과거를 궁금해했다. 어린 시절을, 아니, 귀가 쏙 빠지며 태어나던 순간을, 아니 어쩌면 세포로 존재하던 때까지도 눈에 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으므로 앞으로의 모든 시간, 심지어는 그 애가 죽는 순간까지도, 어쩌면 땅 속에서 썩으며 분해되는 것까지도 놓치지 않고 보고 싶었다. 그 애가 가진 모든 상처를 들춰보고 싶었고 언젠가는 그 애의 상처가 되고 싶었다.


첫사랑이라 세상 물정도 모르고 마음을 드러냈다. 언젠가 떨어져 살게 되는 날은 반드시 올 테고, 그래서 가끔은 지금 죽여버릴까 하는 마음까지도 품었다. 마침내 현호는 깨달았다. 궁극에 치달은 사랑은 파괴적 욕구에 귀결한다는 걸. 사랑하지만 없애버리고 싶은 모순을 현호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난생처음으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글을 써 내려갔다. 'Episode 1. 사랑이란'

두 시간에 걸쳐 글을 완성하고 나니 마음이 잠잠해지는 게 느껴졌고, 지수는 그 글이 향하는 대상이 자신이란 걸 알고 있었다. 다음 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현호는 글을 썼다. 하지만 첫 번째 글만큼 마음의 정수가 담기진 않는 것 같아 금세 글을 내려버렸다. 그러곤 첫 번째 글을 읽고 또 읽었다. 마음이 어질러질 때면 읽고 또 읽었다. 그 애를 파괴하고 싶어질 때마다 읽고 또 읽었다. 그땐 뭐가 그렇게 안달 났던 걸까. 정작 현호는 그 애와의 결실을 바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타탁.


20년이 흐른 지금 현호는 글을 쓴다.


쓰고 또 쓴다. 기분이 좋아서, 마음이 어지러워서, 때론 너무 사랑해서 글을 쓴다. 그러나 그 글들은 모두 20년 전에 내려버린 Episode 2나 Episode 3에 지나지 않는다. 세이클럽, 싸이월드,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으로 차례차례 넘어오다 어느 순간엔가 Episode 1을 잃어버렸다. 어떻게 해도 찾을 수 없는 Episode 1만큼의 글이 다시 나오지 않는 한 현호는 계속 쓰고 또 쓸 것이다. 언젠가는 읽고 또 읽기만 할 단 하나의 글을 쓰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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