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적인 나선형 진보가 되는 길
우리 사회가 겪는 드라마틱한 사건의 전개와 속도는 예상치 못한 수준의 진행을 보여 불과 한 두 달 만에도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변화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압도적인 숫자로 탄핵하고, 이후 근소한 차이로 낙선된 경쟁자가 새로운 대안으로 결정되는 등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경험했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 민족사의 관점에서는 직선적이고 수직적인 대규모 변화로 인식되지만, 전 세계적인 시각으로 보면 조금씩 요동치는 인류사의 작은 변화의 하나로 보일 것이다. 반면에 2019년 말에 발발한 코로나19의 경우는 인류사에 큰 영향을 남기는 중이고, 확신컨대 다양한 분야의 비 가역적인 변화의 기점이 될 것이다. 아마도 이보다 확연히 구분되고 오랫동안 인식할 수 있는 사건은 역사상 극히 드물다.
불연속적이며 느리게 보이고 심지어 인지하기 조차 가능하지 않은 작은 변화는 그저 평범한 일상의 연속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새로운 형태로의 전환은 끊임없이 이어져 궁극적으로는 큰 변화에 기여한다는 것이 나선형 진보를 설명하는 중심 주장이다.
역사해석에 적용된 나선형 진보의 개념을 비교적 규모가 큰 공정기술을 개발하고 최적화를 추진하는 과정 중에 도무지 개선되지 않아 보이는 막막한 시기에 떠 올려 보고 얼마간의 위로를 가졌다. 역사적 진보와 마찬가지로 개발기술의 발전과정에서 거시적으로는 수직적 변화가 거의 관찰되지 않으나, 내부 개발자에겐 지속적으로 이어진 크고 작은 기술개발 결과가 있었기에 수평적으로는 다른 위상으로 발전된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이른바 관점이 다르기에 한쪽에서는 연속적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불연속적으로 보이지만, 누적된 개선 효과마저 수직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면 여전히 정체된 것처럼 보인다. 나선형 진보의 특징은 서서히 수직으로의 상승은 존재하지만, 수평적인 파라다임의 긴 전환을 동반하기에 쉽게 인식할 수 없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간의 노력의 결과를 판단하며, 여전히 수직적 진보가 필요하기에 지루한 일상을 지내는 개발자에게 인내와 열정이 조금 더 요청되는 이유다. 그러다가 몇 가지 중요해 보이는 시도로 인하거나, 수직적인 변화를 평가하는 잣대의 예상치 못한 등장으로 반전된 재 평가가 등장하기도 한다.
오랜 기간 수많은 난관을 거쳐 개발해온 신 공정은 300년 이상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경험과 개선을 통해 현존하는 최고의 열화학 공정으로 평가받는 용광로(고로)에 도전하는 기술이다. 대규모의 생산성과 효율을 자랑하면서 거의 100여 년 동안 철강산업의 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기존 체계의 도전은 힘겨운 과정이다. 신 공정은 낮은 등급의 연원료를 전처리 없이 활용할 수 있는 장점과 환경 관련 배출물질을 최소화할 수 있으며 이산화탄소를 분리, 저장할 수 있는 환경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었다. 아직 이런 가치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시기가 도래하기 전에는 '잉여가치'로 판단되었다. 주된 관심은 상업적 규모에서 용광로 대비 규모나 공정 안정성 등 오래된 잣대로 비교할 때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오랜 기간 ‘부족하고’, 불안한’ 이단아로 인식되었고 , ‘유망주로 언제까지 머무를 것 인가’와 같은 냉소 섞인 질문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개선될 것 같지 않은 반복된 상황은 얼마 되지 않아 상당 부분 해소되던 중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이슈로 등장한 ‘탄소중립’이라는 화두가 대두되면서 새로운 관점을 만나게 되었다. 탄소 기반의 세계적 수준의 효율을 가진 용광로는 어느 순간 이 새로운 잣대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과거에는 ‘미래가치’라고 미뤄두었던 신 공정의 특성이 어느 순간 중요한 대안으로 재해석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파라다임의 변화로 예기치 못한 외적 판단기준의 변화로 신공정은 점진적 개선을 넘어 수직적인 개선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미 존재했으나 다시 인식하게 되는 가치의 재발견(rediscovering)인 셈이다. 오랫동안 내재되었지만 배제되고 단절되었던 공정의 가치가 다른 맥락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하는 첫 발을 딛게 된 것이다.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 재 발견은 그렇게 새로운 가치를 만나게 해 준다. 남 보다 먼저 알 수 있는 관점을 가지는 개인을 이른바 통찰력을 소유한 자라고 부른다. 익숙한 가치로 바라보기만 해서는 숨겨진 보석 같은 가능성을 알아차릴 수 없다. 다르게 바라보면 그 가치의 다른 면을 볼 가능성뿐 아니라, 역으로 그 결함과 부족함이 다른 상황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장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나선형 진보는 거시적인 개선을 설명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지만 새로운 축의 변동까지 고려하여 재평가하면 점진적 진보이면에 급속한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