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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라미수 Jan 10. 2021

너무 멀어지지 마

얼마 전 기분이 물속으로 잠식되었다가 다시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경험을 했다. 발단은 시력저하에 대한 지나친 근심 걱정! 눈이 피로하고 시력이 떨어진 느낌을 받아 검사해봤더니 시력이 많이 안 좋아졌더라. 안경 도수를 올렸는데도 계속 잘 안 보이는 느낌이다. 물건이 잘 안 보여서 눈에 힘을 주면 머리가 아팠다. 나중엔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들어서 눈을 감고 있었다. 이대로 점점 눈이 나빠져서 책을 볼 수 없고 글쓰기도 못할 것 같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이대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괴로워만 했다. 그리고 어느 새벽, 일어나서 책상 앞에 앉았는데,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면서 눈이 다시 좋아져 앞에 있는 공책과 연필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내가 뭘 경험한 거지, 그때는 내가 왜 그랬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왜 그토록 힘들어했지? 아무튼 나는 언제 그랬냐시피 말짱하게 회복됐다. ㅋㅋㅋㅋㅋㅋ 내가 뭐랬어, 곧 원상태로 돌아올 거라 했잖아. 의기양양해짐.


사람의 기분에는 ‘기저선’이란 게 있다고 한다. 아무리 슬프거나 힘든 일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감정이 무뎌지지 않던가? 로또 당첨 후 몇 달이 지나면 당첨되기 전보다 그리 많이 행복하지 않고, 사고로 마비가 된 사람은 사고 전보다 그리 많이 슬퍼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처음에는 기분이 아주 좋아지거나 슬퍼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기저선 기분으로 회귀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다. 난 분명 설정값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회복탄력성 좋은 것 같아. 가끔 우울에 빠져 쭈그려져 살다가도 다시 금방 살아나니까 ㅎㅎ 신난다!!


그럼 이 기저선 기분은 어떻게 결정되는 걸까? 빌 설리번의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은 기저선은 우리의 유전자, 태아 프로그래밍, 아동기 초기 환경에 의해 확립된다고 설명한다.


유전자

감정은 신경전달물질이라는 뇌의 화학물질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런 신경전달물질을 만들고 분해하는 효소, 신경전달물질이 달라붙는 수용체 모두 유전자가 암호화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감정 상태의 상당 부분은 유전자적 수준에서 통제된다. 연구자들은  우울이나 행복과 관련된 유전자를 찾으려고 노력해왔고 몇몇 주목받는 유전자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은 단일 유전자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여러 유전자에 의해 야기되며, 또 우울증과 관련 있는 유전자 변이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꼭 우울증에 걸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우울증은 37퍼센트의 유전성을 띤다고 한다. 그러면 나머지 63퍼센트는 환경이나 장내 미생물 같은 다른 원인에서 온다는 의미다.


후성유전 (환경)

후성유전이란 DNA 염기서열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기분을 저하시키는 유전자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스위치가 켜질지 여부는 환경의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환경, 태어나서 성장할 때의 환경 모두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준다.


태아 프로그래밍

임신 기간 엄마가 먹은 음식, 엄마의 기분 상태는 태아에게 큰 영향을 준다. 임신한 엄마가 정크푸드를 즐겨 먹으면 태어난 아기도 장차 정크푸드를 즐겨먹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엄마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배 속의 태아가 높은 수준의 코르티솔에 노출되어 아기의 스트레스 조절 시스템이 망가질 수 있다. 이런 아기가 자라면 스트레스에 취약해져 정서적으로 고통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부정적 아동기 경험

아동방임이나 아동학대와 같은 부정적 경험은 뇌의 회로 배선을 담당하는 유전자를 재프로그래밍해 스트레스에 더 민감해지게 만든다. (우울증 촉발 요인에 민감해짐)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도 편도체가 과활성화된다는 것이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편도체는 공포반응 그리고 위협에 대처하는 방식과 관련 있는 뇌 영역이다. 이들이 자라서 나중에 우울증 증상을 보이는 이유를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미생물

장내세균도 사람의 기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신기하지 않은가? 사실 소화관이 기분에 미치는 영향은 나도 개인적으로 체감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 가설이 신빙성 있어 보임 ㅋㅋ 예를 들면, 배가 아프면 뭔가 기분이 뭉클뭉클하고 불안한 상태였는데 화장실 한번 갔다 오고 나면 기분이 회복되고 불안 수치가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유별난 것일 수도 있음)  2016년에 있은 한 연구는 우울증에 전염성이 있는지, 그리고 사람의 세균을 통해 전염될 수 있는지 검사해보았다. 우울증 환자의 장내세균을 채취해 무균 생쥐에게 접종했더니, 쥐는 우울증 증상이 생겨 불안 행동을 보이고 달콤한 먹이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미생물이 우리의 기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겠다.  


정크푸드의 위해성

우리의 식단은 장내 미생물을 바꿀 수 있다. 즉 먹는 것이 기분에 영향을 준다는 거다. 나는 정크푸드가 신체건강에 해롭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정신건강에도 해롭다는 것을 이 책을 보고 알았다. 한마디로 정크푸드는 중독성이 강하고 비만을 야기하고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고칼로리 음식은 아편과 같은 방식으로 뇌의 보상체계를 자극하기 때문에, 정크푸드는 엄밀히 말하면 중독성 물질이다. (헉!) 설탕이 코카인보다 더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은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됐다고 한다.


장내세균 중에 후벽균류가 있는데 후벽균은 다른 균보다 더 많은 칼로리를 뽑아낼 수 있다. 비만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이 균들은 탄수화물, 지방, 소금이 많이 든 정크푸드를 즐겨먹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정크푸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장내세균의 균형이 살찌기 쉬운 종류로 바뀌며 이 세균들은 당신의 뇌를 꼬셔서 점점 더 정크푸드를 즐겨 먹게 만들어 악순환 고리에 빠질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크푸드를 먹으면 운동을 하겠다는 동기가 극적으로 감소할 수 있다는 거다. 서구식 식생활이 게으름 및 우울증과 강한 상관관계가 있음이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연구자들은 비만인 사람이 꼭 게으르거나 자제력이 없어서라기보다 정크푸드가 그들의 기분과 행동을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과학서적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유전자, 후성유전이 우리의 감정을 조종하고 있다는 게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기분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잘 알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지금은 우울증을 뚝딱 고쳐준다거나 행복유전자를 심어줄 수 있는 기술이 없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안전하게 유전자 발현을 통제하는 방법은 식생활과 운동 등 환경을 바꾸는 거라고 한다.


운동을 하면 BDNF(뇌유래신경영양인자)라는 유전자 발현이 촉진되는데, 이름에서부터 알다시피 이는 정신적 외상을 받은 후 우리가 얼마나 빨리 회복 가능한지에 영향을 준다. 어떤 사람은 부정적 경험을 하고도 정신적으로 빨리 회복되지만 어떤 사람은 좀처럼 슬럼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 차이를 이 유전자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건강한 식단을 지키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의지력 역시 타고난다는 점을 잊지 말자. 우리는 타고난 유전자와 어린 시절의 환경을 선택할 수 없다. 마치 포커판에서 손에 쥔 카드 패와 비슷하다. 손에 쥔 패를 가지고 최선의 게임을 펼쳐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절대 공평하지 않아.


나를 점검해보자

나는 우울한 유전자를 가졌고 살짝 발현되었다고 의심이 가는 상황이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근심 걱정이 많은 타입이었다. 나는 왜 문제를 심각하게만 생각할까? 왜 웃어넘기지 못할까. 편도체가 과활성화되었나? 하지만 아동기에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경험은 하지 않았기에 패가 썩 나쁘진 않다. 나름 메타인지가 높고 감정조절도 잘하는 수준이라 생각한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생활사건은 우울증을 초래하는 핵심 요소다. 부정적인 감정을 연거푸, 지속적으로 경험하면 기저선 기분이 차츰 다운되어 기분장애가 생길 수 있다. 후유증처럼, 상황이 잘 풀리는 경우에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한 가지 기분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게, 가능한 한 빨리 정상으로 돌아오게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이 글은 한 번에 내리쓴 것이 아니고 여러 날을 거쳐 작성한 것이다. 그래서 시작 부분에서 기분이 가라앉았다가 다시 기저선으로 돌아왔다고 했는데, 지금 끝부분을 쓸 때는 기분이 다시 내리 곤두박질했다 ㅎㅎ 자꾸 반복되는 감정 기복이 힘들긴 하다. 이 글을 쓰는 중간중간 울기도 하고 친구들과 통화도 하고 여러모로 애를 쓰며 기분을 다잡고 있다. 기분아, 너무 멀어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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