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메이너드 케인스 3
영국은 수년간 화폐 공급을 점진적으로 줄이며 파운드화의 가치를 높이려고 애썼다. 공급이 30퍼센트 가까이 줄어들자 드디어, 파운드의 가치가 1913년 수준인 4.86달러에 가까워졌다. 이에 신난 재무부 장관 처칠은 (네, 바로 우리가 아는 처칠이에요) 케인스를 초대하여 이제 금본위제로 돌아가 환율을 영원히 고정해도 되지 않을까요 문의했다. 물론 케인스는 반대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금본위제를 지지했다. 여론의 금본위제에 대한 열망이 워낙 강했던지라 케인스도 막을 수 없었다. 영국은 1925년 4월 28일 드디어 금본위제로 복귀한다고 선언하였다. 사람들은 경제가 곧 좋아질 것이며, 예전의 위대한 영국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를 했다.
하지만 곧 재앙이 시작됨. 금본위제로 복귀하기 전날 파운드는 4.40달러로 거래되었는데 이튿날 바로 4.86으로 고정되면서 파운드 가치가 10퍼센트 이상 상승한 것이다. 파운드화의 가치가 상승하면 영국 상품의 해외시장 가격이 높아진다. 비싸면 팔리지 않는다. 특히 석탄이 치명타를 입었다. 석탄의 달러 가격이 비싸지자 미국인들은 영국산보다는 국내산을 쓰기 시작함. 이에 영국의 광산업자들은 상품 가격을 낮추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대폭 삭감하려고 들었고, 노동조합은 총파업을 선언했다.
케인스는 분노했다.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 케인스는 노조를 싫어했지만 임금 삭감 문제에 관해서는 늘 노동자 편에 섰다. 그는 왜 광부들이 다른 산업 노동자들보다 더 낮은 생활 수준을 견뎌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보통 임금이 내려가면 기업은 상품 가격을 낮게 책정할 수 있고, 물가가 내려가면 생활비가 줄어들기에 노동자들의 생활은 나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모든 노동자 임금이 다 같이 삭감돼서 생활비가 줄어들 때만 성립된다. 지금 상황처럼 먼저 임금을 깎인 광부들은 아직 생활비가 줄지 않았는데 수입이 먼저 줄었으니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 손해를 보는 거다.) 그들은 경제의 희생양이다. 4.40과 4.86 사이의 크지 않은 격차를 메우기 위해 임금을 먼저 삭감당해야 했다. 이는 불공평하다.
총파업은 9일 만에 끝났고 광부들은 몇 달 동안 일에서 배제된 후 가혹한 임금 삭감을 받아들이고 일터로 복귀했다. ㅜㅜ 케인스는 ‘처칠의 경제적 결과’라는 기사를 써서 금본위제 복귀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케인스가 보기에 이것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불가피한 갈등이 아니라 그냥 ‘단순한 실수’로 빚어진 재앙이었다. 금본위제로 돌아간 실수.
몇 년 후 선거철이 다가왔고 케인스는 자유당의 경제 플랫폼을 개발하고 홍보하는 일을 돕기로 했다. 그가 만든 <로이드 조지는 해낼 수 있을까?>라는 팸플릿은 야심 찬 프로젝트들을 담고 있었다. 잠깐, 로이드 조지는 케인스가 자신의 책에서 엄청나게 씹었던 사람 아닌가?
아무튼 ^^ 핵심 정책은 도로 건설을 포함한 인프라 혁신이다. 도로와 다리를 건설하는데 35만 개 일자리를 창출하여 수년간 영국을 괴롭혀온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도로를 건설하려면 건설자재가 필요하기에 건설자재를 생산하고 운송하는 일자리도 창출된다. 또 노동자들이 받은 돈을 나가서 소비하면 소매점과 식당 일자리도 창출된다. 결국 정부가 도로 건설에 1파운드를 지출하면 그 이상의 경제효과를 거둘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승수 효과임. 이외에도 빈민가에 100만 채 집을 짓는다던가 농촌 전기공급 사업 같은 프로젝트가 포함되어있다. 이 프로젝트에 들어갈 돈은 대부분 부채로 조달된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으면 재무부는 실업급여를 아낄 수 있고 경제가 활성화되면 사람들이 소득이 늘어나 세수가 증가한다. 그 돈으로 부채를 갚으면 됨.
잠깐, 이거 너무너무 수상한데?? 이것은 그 당시 지배사상인 ‘자유방임주의’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케인스도 자신의 프로젝트가 급진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사회주의였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을 이내 접어두었다. 결과적으로 케인스의 자유당은 1929년 선거에서 기대했던 만큼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의 대규모 프로젝트들은 영국에서 기회를 잃었지만, 이제 곧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실현되게 된다...
1929년, 미국의 주식시장이 붕괴하기 전, 연준은 주식시장의 비정상적인 투기 과열을 진정시키려고 금리를 전례 없이 높은 수준으로 인상하였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금본위제 다른 국가들도 금리를 인상해야만 했다. (금리를 같이 인상 안 하면 투자자들이 특정 화폐를 금으로 바꿔서 달러로 재투자하려고 하기 때문에 금이 미국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8월에 영란은행은 연준을 향해 미국이 고금리 정책을 유지하면 유럽 국가 대부분이 한꺼번에 금본위제에서 이탈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고금리 정책은 뉴욕의 주식 투기를 억제하는데 별 도움이 안 되면서 해외에서는 투자가 위축되고 물가가 하락하는 불황을 야기했다.
10월, 대공황의 시작을 알리는 주가 하락이 시작되었다. 주가가 폭락하자 연준은 부랴부랴 할인금리를 6퍼센트에서 2.5퍼센트로 인하했다. 하지만 늦었다. 기업들은 생산을 줄이고 직원들은 해고되고, 수입이 줄자 소비가 줄고 이런 연쇄반응으로 11월에 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다. 악순환이 시작됐다. 그리고 유럽은 미국 경제가 무너지면 동반 추락할 운명이었다...
케인스에게 대공황은 기회와 영감이 되었다. 1930년에 그는 <화폐론>을 출간하며 저번과 마찬가지로 또 필생의 역작을 냈다고 믿었다 ㅋㅋ.
케인스의 연구에 의하면 돈이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수단이었다. 먼 옛날부터 금이건 종이건 무엇을 돈으로 할지는 국가가 결정했다. 정치권력 없이 돈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금이 중요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 그러므로 케인스는 경제는 사실상 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정부의 간섭이 없는 ‘자유시장’ 같은 것은 없었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관리가 필요했다.
흥미로운 것은, 케인스는 현대 자본주의의 탄생은 신대륙의 귀금속을 통해 발생한 인플레이션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은화를 운송하기 시작하자 물가가 급격하게 상승하면서 이후 80년 동안 물가가 다섯 배나 뛰었다. 케인스는 바로 이 황금기 시절에 현대 자본주의가 탄생했다고 본다. 갑자기 돈이 넘쳐나면서 투자가 늘고 경제가 살아난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이내 프랑스와 영국으로 퍼졌고 사업가들은 노동자 임금이 올라가기 전에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모든 종류의 상품 생산자들이 생산량을 높이고 이윤을 극대화하면서 예술적 각성이 일어났다. 이는 현대 경제의 발전은 대륙 간 약탈의 부산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임금 삭감 VS 물가 상승
케인스는 모든 역사 자료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고 보았다. 그가 경제사를 연구한데 의하면 역사의 그 어떤 시기에도 현금 수입이 줄어들면 강렬한 저항이 일어났다. 수입 감소를 큰 투쟁 없이 순순히 받아들인 공동체는 없었다. 그러니 ‘급여를 낮추면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긴다’고 아무리 노동자들에게 호소해봤자 소용없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 아니었다. 케인스는 ‘임금 삭감’보다는 ‘물가 상승’이라는 방법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인플레이션은 우회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임금을 삭감하는 방법이다. 물가가 상승하면 내가 받은 급여의 구매력이 감소되기 때문. 이런 방법은 강성노조를 상대하기보다 훨씬 수월하고, 또 특정 산업이 부당하게 먼저 희생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케인스는 예전에 중앙은행이 물가 안정을 위해 금리를 조절해야 한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한술 더 떠서 아예 인플레이션을 의도적으로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적은 국내 투자를 이끌어내고 실업률을 완화하기 위해서이다. 즉 각국의 중앙은행은 물가는 물론 국가의 고용 수준도 책임져야 한다는 것.
하지만 경제 침체가 정말 심각할 때에는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케인스는 중앙은행이 금리를 조절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규모의 투자를 이끌어낼 수 없으니 이럴 때에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투자를 하고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인스는 <우리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이란 에세이에서 주당 15시간만 일하는 미래를 상상해보았다. 기술과 자본의 발전으로 생산력이 폭발하기에 가능하다고 봄. 노동 시간이 줄어들면 남은 시간은 각자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된다. 이거 마르크스의 세계관과 비슷한데? ㅎㅎ 그의 비전은 너무너무 낙관적이어서,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주당 40시간을 일하고 산다..)
케인스는 라디오 방송에 나가서 주부들에게 쇼핑을 하라고 권장하기도 했다. 경제가 안 좋아 허리띠를 졸라매도 모자랄 판에 나가서 쇼핑을 하라니, 주부들의 마음을 제대로 저격했네^^! 애국심 가득한 주부들이 쇼핑을 해서 경제를 살리자는 이 방송 내용은 에세이로도 출간됐고 케인스는 팬레터 속에 파묻혔다. 지나친 절약은 삶의 재미를 앗아간다는 케인스의 생각에 나도 동의한다. 소비를 해야 살맛 나지:)
한편 영국은 10년째 무역적자가 이어졌다 (수입이 수출보다 많은 상태). 영란은행은 금이 바닥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금리를 인상해왔다. 금리 인상이 국내 경제를 망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1년이 되자 국고는 곧 한계에 다다를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수입을 전면 금지할 수는 없고, 어떻게 하면 자금 유출을 막을 수 있을까? 케인스는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해서 가격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비싼 수입품 대신 국내산을 사용할 테니. 소비자는 물가인상으로 생활비가 증가하지만 큰 폭은 아닐 테고, 국내 상품이 많이 팔리면 이는 국내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니 결국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다.
사실 관세 부과는 금본위제로 복귀하며 파운드화의 고평가를 유발한 처칠의 실수를 처리하기 위한 것이다. 케인스가 많은 시도 끝에 난관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지만, 자유무역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케인스를 비난하고 공격했다. 그들은 시장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10년간 전혀 문제를 바로잡지 못했지만~) 케인스는 그들을 ‘옛날 얘기나 떠드는 앵무새들’이라고 하며 받아쳤다.
근근이 버티던 영국은 1931년 9월에 드디어 금본위제를 포기하게 됨. 그해 오스트리아에서 시작한 뱅크런이 독일을 거쳐 영국까지 전파된 것이다.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하며 금융시스템이 붕괴되자 이 나라들은 할 수 없이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