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로맨틱 스토리의 뒤에 숨은 무자비하지만 적확한 철학
처음에는 P.T.A의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해 막연히 두려움이 있었다. 웨스 앤더슨은 매우 좋아하는 감독이지만 짐 자무쉬의 영화는 상당히 보기 빡쎘기 때문이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에 와보니 야금야금 널어놓은 집안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청소기를 한번 돌리고, 쓰레기통의 쓰레기들을 비우고, 빨래를 돌리고, 우디가 실수한 소변을 닦고, 향기 좋은 물티슈로 우디가 실수했던 곳을 한번 더 닦고, 천천히 몸을 씻으며 깎아야지 했던 손톱과 발톱을 자르고, 스킨에 로션까지 바르고, 스타일러의 실내 제습 기능을 이용해 안방의 습기를 줄이고, 빨아놓았으나 껴놓지 않았던 이불보를 껴놓고, 청소기를 한번 더 돌리고 난 후에 진이 빠져 소파에 앉았다.
커피 테이블에 발을 올려놓고 무엇을 볼까, 오늘은 좀 푹 젖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리모컨을 만졌다.
내가 주로 애용하는 올레 TV의 명감독 추천 영화에는 스티븐 스필버그, 우디 앨런과 같은 유명한 감독들의 영화를 모아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나는 특히 우디 앨런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보는 편인데 감독 리스트를 끝까지 내렸다가 폴 토마스 앤더슨을 보게 되었다.
여러 영화가 있었는데 펀치 드렁크 러브라는 영화는 그의 영화 중 그나마 짧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던 터라 자기 전에 한번 보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영화를 틀었다.
첫 장면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주인공의 캐릭터를 보여주고, 정적이면서도 비상식적인 상황들이 계속 벌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아 역시 존나 힘들겠구나 라는 기대를 했다.
다 보고 난 후에는 괜히 힘들었던 것이 아니구나 힘들었던 만큼 좋은 영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로 병신 같은 짓을 많이 한다. 나 스스로도 내가 왜 이런 짓을 하지? 싶지만 멈출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무책임한 짓을 해놓고는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어떻게 되기는 개뿔 당연히 좆되겠지'라는 생각이 같이 든다. 그저 그 상황에서 피하는 것만 생각한다. 동시에 이건 이래서 피하는 거야 나중에 어떻게든 할 거야라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댄다. 물론 그래서 피하는 것도 아니며 나중에 어떻게 하지도 않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까지의 힘든 순간들을 어떻게든 모면하려 애쓰기보다 왜 내가 그 상황에 놓여있게 됐는지 더 고민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나 당신의 힘든 순간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을 수 있으며, 그렇다면 힘든 것은 나나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어야 했을 수 있다. 너무 많이 자책하고, 그 시점에서 사건을 종결시켜버리면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 된다.
내가 죽기 싫다면 누가 나를 죽이려 하는지부터 생각해보자. 의도적으로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도 내가 죽게 된다면 그것은 타인의 탓이다.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왜 힘들고 고통스러운지에 집중해야 한다.
이 영화는 나에게 아름다운 로맨틱 스토리로 포장한 무자비한 철학을 전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