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익명 노트#1 예의없는 작가

내가 만난 예의 없는 저자

by 오홍

20여 년 동안 많은 책을 만들면서 몇 권의 책을 쓰기도 하고 몇 권의 책을 번역하기도 했다.

정말 수많은 작가들을 만나고 수많은 편집자와 디자이너, 영업자, 대표들, 인쇄소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동안 다른 직업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지만 출판계를 벗어난 적은 없었다.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나는 책 만드는 일을 좋아하나?" 자문해 보면 나의 답은 언제나 "그렇다"였기 때문이다.

편집자들도 여러 종류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다지 친절하거나 굽실거리는 편은 아닌 듯하다. 최소한의 예우를 하고, 존중하면서 책을 만들어 가고 싶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내가 책을 위해 기울였던 노력은 종종 '예의없는 작가'들을 만나 좌절하고 자괴감에 빠지게 했다.


대부분의 저자가 책이 나오는 순간, 자기 혼자만의 결과물이라고 착각한다.

초고를 보았을 때 컨셉을 생각하고, 대상 독자를 고민하면서 서체와 포인트, 레이아웃까지 결정하는 것이 편집자이다. 편집자는 작가의 비서도, 그냥 월급받는 직원도 아니다. 책이라는 공동작업을 함께 하는 동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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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초고를 보았을 때 허락을 구하고 구성을 싹 바꾸었다. 컨셉을 정해서 정리를 해서 보냈더니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충격이었다며 불쾌감을 잔뜩 드러낸 메일을 보내왔다. 최대한 작가의 어투를 살리고 순서를 바꾸고 장별로 구분하여 훨씬 주제가 선명해지도록 바꾼 것인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원래 원고로 되돌리겠다 했더니, 막상 원고를 읽어 보고는 죄송하다는 메일을 다시 보내왔다. 초보 저자였기에 자신의 원고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이 있어서, 예민해서 그러리라 생각했다. 글의 문장력보다는 진정성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는 느낌으로 책을 뒤지고 인터넷을 참고해 원고를 채워가며 그로부터는 무리없이 작업을 하게 되었다. 몇 번의 교정을 거치면서 저자가 수정을 너무 많이 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수정도 많지 않았다.

그러다 표지 작업이 진행되었을 때 또 한번 좌절하고 말았다. 편집 디자이너와 컨셉을 공유하며 받은 작업물이었다. 조심스럽게 수정 방향을 이야기하고 일단 저자에게 보여주겠다고 했더니 이미지를 받은 저자는 한참 뒤에 답을 하며 "너무 실망스러워서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라고 했다. 그래서 한참을 통화하며 어떤 걸 원하냐고 물었더니 의식의 흐름대로 이 말 저 말 늘어놓기만 하고 결국 시원한 답은 얻을 수 없었다.

저자 마음에 들 때까지 그냥 수정해 달라고 디자이너에게 말할 수도 없는데, 중간에서 난처했지만 겨우 사정을 설명하고 다시 수정 이미지를 받았다. 그랬더니 서체를 바꾸어라 색을 바꾸어라 이미지를 바꾸어라. 결국 아쉬움만 한가득 남은 표지로 정리되고 말았다. 나의 노력보다 완고한 저자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타협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감일이 정해진 일이니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한다.

출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저자의 간섭은 정말 반갑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나왔고, 여기저기 보내고, 책이 알려지기 위해서 소소한 노력을 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네이버 포스트를 시작하고 관계자에게도 발송하면서 문득 생각이나 안부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그랬는데 저자는 초판부수를 의심하며 자신이 지옥같은 삶을 살았다고 장문의 메일을 보내왔다.


이런 순간이면 내가 초고를 보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죄송하지만 문장력이 부족하고 컨셉이 명확하지 않아 저희 출판사에서는 출간이 어렵겠습니다."

이런 메일을 보내는 상상만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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