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다닌 출판사들은 인문교양, 문학 쪽이 아니어서 소위 베스트셀러를 내는 출판사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작가들과 작업은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외주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어찌어찌 '스타 작가'가 집필한 원고를 맡게 되었다. 유명 작가와 계약을 한 출판사가 막상 진행은 내부 직원이 못미더웠던지 전체 진행 및 교정교열을 내가 맡게 되었다. 그 작가도 '능력 있는 편집자'를 원했고, 그런 일을 나에게 맡겨준 대표에게 고맙기도 했으며 최대한 잘 맞추어서 잘 만들어 보리라 의지를 다졌다.
거의 자판기처럼 글을 써 내는 작가였고, 창작물이 아니라 문학사를 정리한 책이라 그리 어려울 일도 없었다. 기존에 나왔던 책과 유사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쓸 수 있는 분야도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작가는 성실하지 않았으며 3분의 1만 먼저 보내거나, 일부만 잘라서 보내는 걸 계속 붙여가며 원고 교정을 보게 되었다. 방대한 분량이어서 전체 원고를 받는다 할지라도 읽어보는데만 며칠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꼭지별로 들쭉날쭉 분량을 정리하면서 같은 문단이 반복되는 걸 몇 번이나 발견했다. 같은 제목의 꼭지를 다른 내용으로 두 개나 보내는 것도 있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나 싶어서 뜯어 보니 이 작가의 탁월한 기술은 Ctrl + C, Ctrl + V였다.
그러다가 내용이 맞는지 포털사이트에 검색을 해 보니, 아무리 어느 정도의 자기 복제를 허용한다고 해도 돌려쓰기가 너무 심했다. 출간된 책의 미리보기 중 일부와 비교해 보니 유사한 내용이 태반이어서 그 책과 비교해 보는 건 무의미했다. 처음부터 이미 출간된 책과 다른 책을 적당히 Ctrl + C, Ctrl + V 해서 분량만 맞춰 준 것이었다. 이런 일을 출판사와 상의해 보아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출간되면 작가가 책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최대한 어느 정도 틀에 맞추어 작업을 하자는 생각 뿐이었다.
"선생님, 바쁘신 중에 죄송하지만....."이라는 말을 달고 다니며 조심스러운 원고 독촉과 수정 내용 전달을 해 가던 중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작업 중인데 교정 원고를 받으러 오라고 했다. 1차로 보내 준 원고를 내가 정리해서 보내면 그걸 보고 수정 내용을 표시해서 내가 다시 원고를 정리하는 식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작가가 말한 시간 1시간 뒤쯤 다른 약속이 있었지만 수정 내용이 표시된 원고만 받아서 오면 되는 거라 충분히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커피도 시키지 않고 얼른 원고만 받아서 나갈 생각이었는데, 맞은 편에 앉아서 멀뚱멀뚱 작가의 모습만 바라보게 될 줄이야. 아직 수정 중이니 잠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한두마디 인사만 하고 작가가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있는 걸 죄지은 사람 마냥 그저 테이블이나 주변 사람들을 힐끔거리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정 원고를 준다고 해서 받으러 온 건데 컴퓨터로 작업할 거면 그냥 메일로 보내면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차마 입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그 작가를 불쾌하게 만드는 일을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기에. 함께 온 지인이 슬쩍슬쩍 나를 보며 말을 붙여 주기도 했지만 출판계 15년 정도 되는 시점에 이런 대접은 정말 달갑지 않았다.
처음 출판사 대표 포함 다같이 만났을 때도 어느 출판사에서 몇 백을 계약금으로 들고 왔다는 둥, 계약금 천만원은 받는다는 둥 그런 말을 늘어놓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결국 40분 이상 불편하고 불쾌한 자리를 견디다가 조심스럽게 "제가 시간이 걸릴 줄 모르고 다른 약속이...."라고 운을 뗐더니 잠시 있으라고 하고 몇 분 뒤 한다는 소리가 "거의 다 정리했으니 메일로 보낼게요."였다.
'아, 이 작가는 편집자 길들이기를 하고 있구나.'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다. 그 작가는 누군가에게 세상 따뜻한 모습을 보일지 모르나 내가 본 민낯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듯하다. 시 공부를 하며 친분이 있던 다른 시인 선생님에게 그 작가에 대해 조심스레 물어 보니 말을 아끼시고,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지는 표현에 그도 그 작가의 민낯을 알고 있구나 싶었다.
이후로도 그 작가는 콘텐츠보다는 책의 물성에 관심이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