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그만큼만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작년은 나에게 뜻깊은 한 해였다. 결과물로 따지자면 크게 이룬 건 없지만 단 하나, 나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노력을 계속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지금까지 이어온 것만으로도 나에겐 소중한 성과였다.
나는 후회와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과거를 회상하며 어린 날의 결정을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결정을 미뤘다. 하지만 이제야 들여다보게 된 내 마음의 진심이 있다.
그때 나는 그만큼만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의 나는 넘치는 열정을 담을 그릇이 부족했고, 사회로 나온 후 그릇은 커졌으나 열정이 부족했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지난 시절 나를 가장 붙잡았던 것은 ‘돈’이었다. 합리성이 1순위인 나의 성격은 타고난 기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내 성격이 기질이 아닌 돈이 만든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창 시절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학교에 내야 하는 여러 납부금들이 연체되는 경우가 잦았다. 고등학교 수업료, 급식비, 보충수업비, 현장학습비 등, 그 시절 내야 하는 돈은 왜 그리 많았는지. 민감한 사춘기 학생이었던 나는 주변엔 꼼꼼하지 못한 엄마 때문에 생기는 일인마냥 포장했지만 사실 집에 돈이 없어서 생긴 일들이었다.
20대가 되어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대학 시절 학과나 동아리 모임에 가면 항상 시계를 보며 막차 시간을 확인했고, 저녁 모임이라도 있으면 머릿속으로 지갑 속에 있는 돈을 계산하며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교통카드의 잔액은 항상 간당간당했고, 넉넉하지 못한 지갑 사정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지 못했다.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서야 그나마 조금 숨통이 트였었다. 돌이켜 보면 아마 이런 성격 때문에 그 시절 알게 모르게 나를 떠난 사람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때는 나를 챙기기에 바빠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주변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여유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한 후 나의 생활과 성격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생기고 그 돈을 내가 통제할 수 있게 되자 가장 크게 생긴 변화는 주문 음식을 먹는 횟수였다. 먹고 싶을 때마다 통닭을 시켜 먹고, 친구와 영화를 보고, 밖에서 사 먹는 파스타 한 그릇의 가격이 아깝지 않았다. 약간의 문화적 사치와 여행은 나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리고 꼬박꼬박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통장과 지갑 속의 10원 하나도 틀리지 않게 확인하고 카드, 현금 별로 지출을 기록했다.
지난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나는 무엇이든 연체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카드대금 결제일, 업무의 마감기한, 도서관 반납일 등 기한이 있는 일은 미리 해놓아야 마음이 편한 성격으로 바뀌었다. 즉흥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던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모든 일에 계획을 세우고 기록에 집착하는 성격으로 바뀐 것이다. 여전히 마음속에는 하고 싶은 것이 많고 못 이룬 꿈에 대한 미련도 있었지만 정기적인 수입을 놓는 게 쉽지 않았다. 그 시절 나에겐 안정이 1순위였다.
최근 서랍 속에 10년 넘게 보관만 하고 있던 스무 살 시절의 MBTI 결과지를 발견했다. MBTI의 결과는 “ISFP 호기심 많은 예술가”였고, 당시의 나는 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이루기 위한 계획성이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십 수년이 흐른 후 나의 MBTI 결과는 몇 번을 다시 해도 “ENFJ 정의로운 사회 운동가”이다. 항상 같다고 생각했던 나의 성격은 나도 모르는 사이 변하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나는 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고민은 먹고사는 문제에서 해방되었기에 가능했다. 풍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부족함이 없는 남편의 수입은 나를 경제적 고민에서 해방시켜 줬다. 돈을 위해 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벗어나자 나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남편은 자신은 하고 싶은 일이 없어 회사를 다니니 나라도 하고 싶은 걸 찾았으면 좋겠다고 격려해준다.
예전에는 시간을 돌린다면 더 나은 선택을 했으리란 후회에 빠져 놓친 것들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과거의 나는 더 나은 선택을 하지 못했을 거란 확신이 든다. 그때의 나는 그만큼만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런 과거의 결정들이 쌓여 현재의 나를 만든 것이다.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며 나에게로 향하는 진지한 고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지나간 날들에 대한 후회보다 앞으로는 내가 우선시되어 원하는 일을 맞이하길 바랄 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많은 변화를 겪었다. 성격이 바뀐 것일 수도 있고 사실 이게 진짜 내 모습일 수도 있다. 요즘 나는 나를 알아가는 것, 그리고 변화에 따른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즐겁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하고 그 일을 기반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으로 남는 것이 요즘 내가 삼는 가장 궁극적 목표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만들었듯 또다시 지금의 내 생각과 결정들이 앞으로 나에게 다른 길을 열어주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