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과 미대 입시생 그 사이
매일 자정을 훌쩍 넘긴 후에야 작업이 끝났고, 종종 손톱에 콘테와 아크릴 물감이 끼인 채로 출근하곤 했다. 옷 잘 입는 동료들이 즐비하던 회사에서 (백화점 계열이었기 때문에 패션센스가 꽤 중요했다.) 난 선크림만 겨우 바른 채 펑퍼짐한 스웻셔츠를 입고 영혼이 반즘 나간 채로 출근을 했다. 아마 나의 사수 과장은 속으로 ‘쟤 요즘 왜 저러지’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직장인과 미대 입시생의 삶을 동시에 사는 건 낭만적이었지만 솔직히 버거웠다. 레슨 초반에 시작했던 간단한 콜라주나 오일 파스텔 드로잉을 넘어서 본격적인 아크릴 페인팅과 콘테 드로잉으로 넘어갈 무렵 내 시간과 체력은 포트폴리오에 열중되어 있었다. 회사에서 업무를 최대한 빨리 끝내 놓고 남는 시간에는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 구상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1년 정도는 주경야작의 삶을 살아야지만 12월 연말까지 약 20개의 포트폴리오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인 2018년 연초에 미국 아트스쿨에 지원을 해서 5월 즈음 합격 통보를 받으면 당당히 퇴사를 하고 9월에 미국에서 가을학기를 시작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주경 야작의 루틴이 약 두 달 정도 되었을 때,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재밌니, 그림?”
파김치인 몰골로 회사를 다니며 밤에는 사부작사부작 무언가를 그리는 막내딸을 지켜보던 엄마가 내 근황을 물으셨다. 부모님은 그때까지 내가 취미로 미술학원에 다니는 줄 아셨다. 언젠가는 솔직하게 말씀드려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 재밌어. 엄마 근데 나 취미로 미술 하는 거 아니고 미대 유학 준비하는 거야.”
“유학? 회사는?”
“내년에 합격하면 퇴사하려고.”
“뭐?”
내 예상대로 엄마의 긴 연설이 이어졌고, 아빠까지 합세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나는 반박할 여지없이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