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속도

by 저나뮤나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건 화요일 밤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야간 배달을 나갔다가 교차로에서 비보호 좌회전을 하던 차량과 충돌했다고 했다.
엉덩이뼈가 부러지고 발목이 주저앉았지만 의식은 있었고,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그는 응급실을 거쳐 일반 병동으로 옮겨졌다.

병원을 찾았을 때 아버지는 조용한 병실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침대 곁에 앉아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그의 손을 타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이미지가 흘러들었다.

젖은 바닥. 어둡고 낡은 방. 반쯤 열린 문.
그리고 그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실루엣.


'어디서 봤더라...'


알아볼 수 없는 형태를 한 실루엣은 얼굴이라 부를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존재가 나를 또렷하게 응시하는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남의 기억을 보는 사람이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열한 살 반 정도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반 아이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울던 날이었다.

나는 위로를 해 줄 마음에 그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그 순간 그 애가 핸드폰을 자기 책가방 안주머니에 넣는 장면이 흘러들었다.


그 아이의 기억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타인의 기억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기억은 느리다.


기억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도 내가 어떤 방법으로 기억을 보는지 설명한 적이 없어서 기억은 느리다는 말 외에 어떤 방식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기억은 현실의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며 또렷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때로는 잊힌 것처럼 보이지만 사라진 적은 한 번도 없다. 한 걸음 뒤에 반드시 존재한다.


아버지는 낮에는 잠을 자고 밤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일을 하러 나갔다.
우리 사이에는 오랜 침묵이 있었다.
서로를 피한 건 아니었지만 가까워질 이유도 없었다.
그건 우리끼리의 규칙이었고 감정 없는 질서였다.


어머니는 내가 여덟 살이던 해, 비가 많이 오던 밤에 사라졌다.
아버지는 그날따라 더 말이 없었다. 그 이후로 나도 아버지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그럴 수 있지" "오죽하면" 이라고들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왔다.
낮잠을 자던 사람이 그날은 꽃을 손에 든 채였다.
말없이 꽃을 건네던 그의 손이 내 손끝을 스쳤다.
그 순간 낯선 장면들이 일렁였다.


차가운 공기. 방 안을 가득 메운 정적.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의 흔적.
낯선 피비린내. 그리고 끊어진 웃음소리.


그의 기억이었다.
내게 꽃을 건네는 그의 눈은 텅 비어있었다.


아버지의 병원을 방문한 후 나는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어두운 공간 안에 축축한 땅의 기운이 가득했다.
그 안에 무언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림자. 아버지를 닮은 실루엣.


아버지와 닮았지만 아니다. 아버지가 아니다.


발과 땅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몸이라 부를만한 것은 무중력에서 존재하는 듯 아래위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나는 그것이 아버지의 기억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라는 걸 알았다.


감정이 너무 무거워 기억을 품을 수 없을 때 기억은 새로운 형체를 얻고 분리된다.

나는 그것을 조각이라고 부른다. 조각은 언뜻 어딘가로 향하는 듯 움직이지만 고립된 채 떠돌게 된다.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나온 조각은 아버지와 멀지 않은 곳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그 조각이 내 꿈에 나타나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기억과 꿈, 꿈과 조각은 그것들 나름의 규칙으로 움직인다.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계를 공유하지 않는다.


몇 달 후 아버지는 퇴원했다.

나이 때문인지 아버지의 회복은 의사들도 이상하게 생각하리만큼 느렸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다시 원래의 자리에 돌아왔다.


아버지의 조각을 처음 보았을 때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아버지가 더 이상 그 기억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더 슬펐다.


기억은 감정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다. 무거운 감정이 실린 기억일수록 움직임의 속도가 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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