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다 찍지 마

by 저나뮤나

"거기다 찍지 마."


인희가 말했다. 어깨 너머로 내 원고를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다 그녀의 미간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마침표를 찍었다.


인희는 가끔 그런 말을 했다.


"무언가를 가장 적절한 자리에 두는 건 위험한 일이야. 균형이 거기서부터 무너지거든."


나는 그 아리송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인희의 그런 성격 때문에 그날도 내 작업이 끝나는 걸 인희가 방해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다. 대체로 말없는 것들. 말 없이 무너지기도 쉬운 것들이었다. 그녀에게 소중한 것들이었다.


그날 나는 원고를 마무리하고 외출을 하려던 참이었다.


몇 달째 편집자와 술래잡기를 했다.


지친 편집자는 "못 찾겠다 꾀꼬리"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보내왔고 나는 그걸 끝내 열어보지 않았다.


그 편집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편집자에게 못할 짓을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필 인희가 그날 쓰러졌다.


그날은 인희가 스물아홉으로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거기다 찍지 마'는 우리 둘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지하철역에 도착해서야 핸드폰을 두고 왔다는 걸 알았다.


초록이 짙어지는 5월의 아침이었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면 이십 분쯤 걸어야 했다.


잠시 망설였다.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이 발끝을 스쳤다.


이런 날씨에 지하로 푹 꺼져버리는 건 뭔가 계절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방향을 바꿔 집 쪽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조금 전 지나온 길이었지만 도시는 한층 더 싱그러웠다.


분초를 다투며 생명을 밀어올리는 봄의 기운 때문이었을까.


머리 위에서 내려온 5월의 햇살은 어깨를 타고 내려와 가슴을 지나 발끝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습관처럼 걸음을 세기 시작했다.


백스물넷. 백스물다섯.


인희랑 하던 놀이였다.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몇 걸음이면 도착할까.


누가 더 많은 걸음으로 갈까.


누가 더 적은 걸음으로 갈까.


누가 더 빠르게 숫자를 셀 수 있을까.


누가 더 느리게, 아주 느릿느릿 숫자를 셀 수 있을까.


그런 놀이였다.


'누가 더 느릿느릿 숫자를 셀 수 있을까' 놀이를 하던 날이었다.


파란 점이 찍힌 전신주 옆에 서서,


서로가 다음 숫자를 먼저 외치기만을 기다리며 20분을 가만히 바라보던 기억이 났다. 누가 먼저 숫자를 말했더라...


인희의 머리카락은 짧았고 목선은 유난히 고왔다.


안경을 아무렇게 쓴 얼굴에는 주근깨가 박혀 있었다.


나는 이백오십사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인희는.


인희가.


인희도.


머릿속은 온통 인희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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