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L
나에게 도서관이란 조용한 은신처 같은 곳이었다. 책 속에 둘러싸여 누구도 나의 위치를 찾을 수 없는 곳, 행여나 나를 찾는 전화가 오면 손가락을 나란히 붙여 입을 막은 후 주파수가 잘 안 잡히는 라디오 소리처럼 낮고 빠르게 "나 지금 도서관"이라고 짧은 말을 내뱉고는 전화를 끊어버려도 이해가 되는 곳. 언제든 세상과 분리되어 조용히 머물 수 있는 곳이었다.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기뻤다. 이런 곳이 직장이라니. 이런 곳에서 일하면서 돈도 받다니!
아뿔싸... 하지만 내가 일하는 곳은 미국 공공도서관. 게다가 나는 이용객이 아닌 피고용자. 숨기는커녕 내 이름이 큼지막하게 써진 명찰을 달고 도서관에서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이용객들을 응대해야 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레퍼런스 데스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옆에 앉아있던 사서는 전화로 이용객을 상대 중이었는데, 그 순간 사서를 찾는 다른 이용객이 도서관에 왔다. 사서는 길을 알려주면 되는 일인데 이 전화를 이어서 받아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뭐 달리 선택지가 있는 일도 아니고 알겠다 말하고 전화를 넘겨받았는데 , 이 길을 알려주는 일이라는 게 상당히 골 때리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제가 지금 +++에 있습니다.
(옳커니, 그다음에 어디로 가라고 말씀드리면 되겠구먼)
-운전을 해서 XXX에 가려고 합니다.
(구글맵 검색 바로 합니다. 지금 계신 곳에서 좌회전 몇 번 우회전 몇 번 직진 쫙. 하시면 됩니다)
-그럼 출발합니다.
(네에? 무슨 출발? 왜? 아니? 잠깐만요! 웨이터미닛! )
알고 보니 이 이용객은 도서관에 전화를 해 인간내비게이션 서비스를 부탁한 것이다. 자기 차에는 네비가 없고, 지금 당장 운전을 해서 목적지까지 가야 하는데, 컴퓨터도 없으니 도서관에 전화를 걸어 길안내를 부탁한 것이다.
나는 심각한 길치다. 동서남북은 물론 내가 지금 서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왔던 길을 똑같이 되짚어 나가는 경우라도, 왔던 길과 돌아가는 길이 완전히 다른 길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길치다. 그런 길치가 지도만 보고 전화로 길을 안내해야 하는 인간 네비가 된 것이다.
이용객은 신호에 멈춰 설 때마다 자기 위치를 전했다. 옳지 않았다. 내게 길안내는 모국어로도 금기다. 영어로 길안내라니...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낯선 길이름과 계속해서 인간 네비의 오차 없는 서비스를 기대하는 도서관 이용객의 물음에 나의 영혼은 안드로메다로 떠날 채비를 했다.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사람들은 참 당당하고 용감하구나 생각할 때가 있는데, 이런 경우다. 나라면 길을 몰라도 도서관에 전화해서 인간네비를 구할 생각 같은 것은 절대 안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예 도서관이라는 단어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도서관은 책을 빌리는 곳이 아니던가. 하지만 미국공공도서관의 서비스 폭은 내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는 곳에 있다. 이용객도 근무자도 도서관 서비스의 범위가 생각보다 넓다는 점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다. 일단 궁금하면 물어나 보지 뭐 하는 미국 특유의 정서와 멍청한 질문 같은 것은 없다는 미국의 독특한 문제해결 접근 방식이 맞물리면서 공공도서관에는 기발한 질문이나 요청사항을 들고 오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아무튼, 그때 한번 그렇게 인간 네비가 된 경험 이후로 다행히 스마트폰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다시 인간네비가 된 경우는 다행히도 없었다. (그렇다. 오타가 아니다. 한 문장에 다행이라는 말이 두 번째다) 하지만 이 경험은 그 당시 도서관 업무에 첫발을 디딘 나에게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일이 되었다.
그날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결국 그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했고 나의 영혼은 안드로메다를 향하다 아직은 지구가 살만한 곳인가 싶어 급하게 지구로 회향했다.
넋이 나간 얼굴로 옆에 있던 사서에게 질문을 던졌다.
"뭡니까, 이거? 이거 저희가 해야 하는 일 아닌 거 아닌 건건 아닌가요? (아직 영혼이 지구로 돌아오는 중이다)"
"가끔 있는 일입니다. 길을 안내해 드리면 끝나는 일이에요. 그분은 잘 도착하셨던가요? :) "
".... 그것이 네, 잘 도착하셨겠는데요. 가... 끔... 있는 일이라 굽쇼...?? (돌아와 내 영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