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buzz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저나뮤나 Aug 26. 2023

Pachinko / Min Jin Lee

FIC LEE

2017년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가 발매되었을 때 이민 3세대 일본계 미국인 친구의 추천으로 이 소설을 읽었다. 파친코는 사회 한 모퉁이에 신화처럼 존재하는 비주류들의 삶을 이민진 작가의 끈질긴 집념으로 30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그려낸 작품이다.


이민자로 미국에 와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만들며 살아가는 나의 삶은 파친코 속 등장인물들의 삶과 닮은 구석이 있다. 물론 일제 강점기 시대의 일본 거주 한국인의 – 정확히는 멸망한 조선/ 대한제국 백성 – 삶과 21세기 미국 거주 한인 이민자의 삶을 비교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 파친코 속 인물들이 낯선 땅에서 이방인의 삶을 살며 짊어져야 했던 삶의 고단함과 상실감을 바라보며, 21세기 미국에서 소수 민족으로 아시안으로 여자로 살아가는 내가 느꼈던 깊은 동병상련은 진심이다.


이민자들은 고향을 떠나면서 자신의 뿌리를 새로운 땅에 옮겨 심는다. 익숙했던 물과 공기, 자양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땅에 뿌리를 새로 내리고 낯선 물과 공기와 자양분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은 녹록지 않다. 이 힘든 일을 태평양 전쟁 중에 겪은 이가 파친코 주인공 선자다. 선자의 삶이 얼마나 어려웠을는지는 짐작조차 쉽지 않다.


그 시대에 태어난 많은 이들의 삶이 그러했듯 선자의 삶은 슬픔과 비극적인 사건으로 채워져 있다. 선자는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폭력을 목격해야 했고, 일제의 수탈을 참아내야 했으며,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 징집의 공포 속에 살아야 했고,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받지 못했으며,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멸시당했고, 사상의 자유가 없는 시대에서 사느라 남편 백이삭을 잃게 되었고, 가족제도와 사회의 모순으로 자식을 잃게 되었다.


사실 편안하게 앉아 파친코를 읽는 일은 쉽지 않다. 어마어마한 슬픔도 비극도 느낄 여유 없이 거대한 역사의 무게를 애써 외면하며 살아내야 하는 선자의 삶을 지켜봐야 하는 일은 참으로 마음이 상하고 아픈 일이다. 슬픔보다는 생존이 먼저였던 선자의 삶과 그 뒤에 오는 세대들의 삶은 보는 이들에게 선명하게 각인되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며 살아있는 역사를 기억할 것을 요구한다.


파친코는 1920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이 시기를 한국인들은 만세운동, 강제징용, 강제동원, 위안부, 물자수탈, 고문, 밀정, 감시 등의 단어와 연관 지어 기억해 왔다.


안타깝게도 백여 년이 지난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1920년대는 이 키워드들 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키워드로 기억되는 역사는 박제되어 전시되는 역사다. 역사가 박제되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박제된 역사는 호흡을 멈추기 때문이다. 호흡을 멈춘 역사는 나에게 어떠한 의미도 없다. 그 안에서 일어난 사건의 의미나 중요성은 나와는 상관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나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와닿지 않는 먼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잊히는 것이다. 그래서 호흡을 멈춘 역사는 사망한 역사다.


파친코는 박제된 역사에 생명을 불어넣고 호흡을 되살렸다. 덩어리로 뭉뚱그려져 있어 선명한 형태를 알 수 없던 역사의 겹겹이 접힌 이야기의 주름을 정성스럽게 펴냈다. 역사 속 이야기가 무게감 없이 허공을 떠다니지 않고 누군가의 가슴에 딱 와닿는 경우가 있다. 바로 시간의 주름 사이에 갇혔던 사람의 호흡이 이야기와 함께 전달될 때다. 시간이 아니라,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할 때 비로소 역사는 그 역사를 살아낸 자들이 후대에서 알아채기를 원했던 이야기의 형태로 복원될 수 있다.


파친코는 어려움과 좌절감에 굴하지 않고 시대를 살아낸 영웅적인 인물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파친코는 비극적 역사 속에서 선자라는 한 뿌리 뽑힌 여성으로부터 시작되는 4대에 걸친 “삶이라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이 개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할 때 역사는 시간 속에서 정확한 좌표에 위치할 수 있게 된다.


위안부와 강제 징용을 포함한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사, 제2차 세계대전이 한국과 일본에 미친 영향, 일본 내 한국인들의 차별문제, 한 사회 내에서 이민자들이 겪는 어려움,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는 한일 갈등 등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그 어떤 역사책 보다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선자의 이야기가 그 질문에 대해 충분한 답을 줄 것이다.


파친코를 통해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호흡을 느낄 수 있다. 파친코를 통해 살아난 역사는 더 이상 활자를 통해 보는 식상한 역사가 아니다. 나와 꼭 닮은 사람들이 삶이 던지는 과제들을 살아내는 이야기 파친코는 마땅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변의 카프카 / 무라카미 하루키 ; 김춘미 옮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